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대중일보의 논조에 불만을 가진 일련의 좌익 성향 기자들이 대중일보를 떠나 인천신문을 창간한 것은 1946년 3월 1일이었다. 인천신문은 창간사에서도 좌파 성향을 드러냈고 여운형과 조봉암이 축하 글을 실었다.

당시 인천은 특히 좌파 성향이 강했던 도시였기에 좌파 성향 기자들이 대중일보에서 독립해 신문을 창간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인천신문의 창간사에는 창간일인 3월 1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민족해방사 상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최대 기념일인 3‧1운동이 일어난 날에 창간해 그 영웅적 정신을 지면에 살릴 것을 다짐하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완전 자주 독립을 위한 선전자와 계몽자로서 민주주의를 생활화시키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투신하겠다고 창간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인천신문은 발행인 겸 편집인에 손계언, 인쇄인 김수근, 편집국장 엄흥섭, 논설위원에 이원조와 김남천을 주요 간부로 창간했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6일자 2면에 실린 인천신문 피습사건 등 관련 기사.(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자유신문 1946년 10월 6일자 2면에 실린 인천신문 피습사건 등 관련 기사.(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전 글에 다뤘던 것과 같이 인천신문은 좌파적 논조 때문에 미군정과 갈등을 빚었는데, 신문 발행을 위한 제반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섰고 여러 사회적인 요인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해방직후 한국에서 첫 필화사건으로 기록된 인천신문 사건은 좌파 성향 언론을 견제하려는 미군정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또한 정확한 팩트 체크가 부족한 상태에서 작성한 기사가 원인이었다.

1946년 5월 5일자 인천신문은 “인천 미군정청 적산관리국 공업과장 노재룡, 일본인 적산가옥 부정 보유”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 좌익 성향 언론이 득세하는 것을 경계하던 미군정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고 인천신문 간부들을 대거 검거했고, 인천신문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물론 당시 적산 가옥 또는 일본인들 재산과 관련해 각종 비리와 불법이 난무했으니 합리적 의심을 기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대중일보도 인천신문 기사를 두둔하는 기사를 실었으나, 명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한 기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7월 5일에는 인천신문 이사장 김수영, 총무국장 손계언, 논설위원 이약슬, 인천상우공동조합 상무이사 박찬석과 사무원 등이 업무상 횡령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중일보 기사를 보면, 이들은 제물포상인보존회의 경영이 문란한 틈을 이용해 김수영이 조합장, 이약슬이 이사로 들어가 인천상우공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쟁 중에 없어진 송현동 일용품공설시장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영세상인 210여 명의 출자금 60여만 원 중 43만 원을 부당지출해 경영이 어려운 인천신문 뒷돈을 대고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어려운 신문사의 경영이라는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 일이라고 추측된다.

이렇듯 인천신문은 좌편향된 편집 방향으로 창간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는데, 9월 10일에 국내 곳곳에서 일어난 철도 파업에 동조해 휴간에 들어가는데, 이때 인천신문 논조에 불만이었던 우익 청년들이 신문사에 난입해 시설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천신문은 지속되는 악재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지나친 좌편향으로 독자들에게도 외면 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급기야 1948년 3월 22일 취체역(取締役)회의(=이사회)에서 ‘사장 이하 사퇴 권고 결의’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결국 인천신문은 대표를 김수영에서 이근세로 바꾸며 논조도 바꾸고 회생을 도모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이 인천의 향토지로 역할을 시작하던 1946년에는 인천지역에서 기자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이에 따라 기자들의 협회가 결성됐다. 1946년 1월 16일에는 인천 지역 신문사 기자들 뿐 아니라 중앙지와 통신사 기자를 포함한 인천기자협회가 발족했다.

인천기자협회 소속 회원들은 인천에서 활동하던 기자들을 망라했는데, 동아일보 인천 지사장 곽상훈, 인천합동통신사 지사장 이순근, 편집부장 박병훈, 기자 신현철‧김성현‧박성호가 회원이었다.

또한 한성일보 인천지국장 김하겸과 기자 김완신‧김윤종, 대동신문 인천지국장 최철과 기자 김세영, 대중일보 편집국장 이동오와 편집차장 김현홍, 기자 윤치봉‧민경희‧박상길‧우기영 등이 회원이었다. 4월 23일에는 가입 자격을 잡지 기자들까지로 확대했다.

인천기자협회는 1947년에 회원사로 대중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한성일보, 민주일보, 자유신문, 중외신문, 조선수산경제신문, 합동통신, 전보통신, 서울통신을 받아들였고 위원장은 조희순을 선임했다. 부위원장은 이동오와 이순근을, 상임위원은 고일, 맹헌, 최철, 박용하, 최성연을 선임했다.

10월 18일에는 인천시정기자단이 결성돼 대중일보 김차영, 합동통신 양성엽, 민주일보 맹헌을 상임간사에 선임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인천시정기자단은 임홍재 인천시장이 합동통신 출입 기자 김영순에게 모욕적 언사를 한 것에 대해 항의문을 전달하고 결국 시장 재신임 투표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1947년 8월 14일에 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은 인천시정기자단을 탈퇴했고, 두 언론사와 일부 중앙 언론 기자들로 9월 9일에 인천기자연맹을 따로 결성했다.

출범 당시 인천기자연맹은 위원장에 대중일보의 송수안, 부위원장에 인천신문 이완희와 대중일보의 진종혁을 선임했고, 위원에 인천신문의 김성‧심영섭‧주효민, 대중일보의 김권일‧김차영‧박상길‧김완신, 합동통신 박병훈, 독립신문 이종서, 현대일보 이응윤, 동아일보 최영복 등이 참여했다.

두 개로 나뉘어져 활동하던 기자단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1948년 7월 21일에 인천일선신문기자회로 다시 통합 결성해 활동한다.

인천이라는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기자단이 두 갈래로 갈라섰다 다시 합쳐지는 과정은 당시 기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노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천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기자들 사이에 갈등이 꽤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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