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7)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전쟁이 일어나면 일반 대중들의 정보 갈증이 심해지기에,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언론은 전쟁 시에 호황을 누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때로는 종군 기자들의 활약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기도 한다.

전쟁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언론에게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워낙 심각했고, 신문 발행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기에 한국의 언론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8일,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측 군인이 서울을 점령했고, 이에 따라 모든 언론의 발행이 중단됐다. 동아일보는 6월 27일자 호외를 발행한 이후 종간했고, 조선일보는 28일자 조간을 발행하고 종간했다. 서울을 점령한 북측 군인은 미군정이 폐간했던 좌익 신문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를 기존 언론사의 시설을 이용해 속간했다.

서울이 북측 군인에 의해 함락되고, 피난을 떠난 정부의 임시 수도 부산에선 온갖 모리배들이 신문 기업을 설립해서 이익을 취하려고 했다. 팔에 ‘Press’ 완장을 차고 기자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도처에 넘쳐났다.

사이비 신문에 의한 피해가 늘어나자,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자 당시 공보처장 김활란이 중앙지 4개와 각 도별 신문사 1~2개로 정비하려고 시도했으나 반발로 실패했다. 언론사의 정비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신문의 신규 발행은 불허했다. 정보가 부족한 전쟁 통에 한몫을 잡으려는 사람들의 생존 투쟁이 그만큼 심했던 것이다.

미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9월 28일에 수복되자 당일 국민일보가 서울에서 복간을 했고, 10월 1일에 서울신문, 4일에 경향신문과 동아일보가 복간했다. 조선일보는 발행인 겸 편집인인 방응모가 납북돼 행방불명 됐던 관계로 발행 허가가 나지 않아 10월 23일에서야 복간할 수 있었다.

1951년 9월 2일자 마산일보에 실린 부산일보 마산총국 직원 모집 광고.(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951년 9월 2일자 마산일보에 실린 부산일보 마산총국 직원 모집 광고.(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951년 전황이 다시 악화돼 1.4 후퇴를 하게 되자 신문들도 부산으로 옮겨가서 발행을 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부산일보의 인쇄 시설을 이용해 신문을 발행했다. 조선일보는 1951년 8월 1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속간을 했고, 동아일보는 1953년 8월 18일까지 부산에서 신문을 발행하다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신문사의 경영은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대표적인 신문이던 동아일보는 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 되던 해까지 광고 수입이 전체 수입의 14%였다. 일제 강점기의 탄압 속에서도 광고수입 비중이 31%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신문의 경영난이 극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문 경영이 어렵다고 해서 신문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신문 숫자는 증가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했다. 신문이 이권을 챙기는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신문을 창간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언론 본연의 임무와는 동떨어진 부정부패와 이권 챙기기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신문에 의한 폐단이 심각해지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는 언론사 정비를 다시 시도했지만 임시 수도 부산에서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신문사의 반발로 무산됐다.

1954년 공보처에 등록한 정기간행물 숫자는 총 411개였다. 일간신문이 56개였고 주간신문이 124개였다. 월간지는 177개였고 격일간 계간 등의 기타 간행물이 54개였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간행물이 277개로 전체의 67.4%를 차지했다. 당시 서울인구가 150만 명이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과도하게 신문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신문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신문사들이 이권을 챙기는 권력 기관화되고 온갖 비리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쟁의 혼란이 사이비 언론이 난무하는 환경을 제공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듯 어지럽고 폐단이 심각했기에 정부에서 언론사를 정비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타당한 시도였다. 다만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이승만 정권이 언론 개혁을 시도한 것은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심한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 개혁의 필요성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함량미달의 매체가 언론을 표방하고 가짜뉴스와 자극적 콘텐츠로 영업을 하는 현실은, 여전히 언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언론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언론사의 반발로 인해 항상 실패했다.

정부가 언론 개혁에 나서는 것은 곧 언론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민주 사회에서 정부 주도의 언론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기레기 등 비아냥의 의미를 담은 별칭이 언론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외람이’라는 명칭까지 생겨났다. 기자가 권력자에게 “외람되오나~”라는 서두로 질문을 시작했기에 생겨난 별칭인데, 낯 뜨거운 한국 언론의 자화상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