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1)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 최초의 신문, 대중일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을 다루는 4번째 글이다.

● 김차영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김차영은 1922년 인천 강화 길상면에서 출생했다. 1941년에 잡지 ‘신시대’에 시 ‘야영’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김차영은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히다치제작소와 타나카공업주식회사 등에 취직해 근무했다. 1945년 인천문학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동인지 ‘문예탑’을 발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문예탑은 광복 후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문예동인지이다. 등사판으로 인쇄돼 조악한 형태였지만, 1945년 광복이 된 바로 당일 창영동에서 김차영을 위시해 송종호, 우봉준, 신영순, 한재홍, 윤기홍 등이 모여 주도한 동호회인 ‘신문화협회’에서 발간한 최초 문예동인지로 의미가 있다.

문예탑은 그 이전에 최초의 문예지로 알려진 ‘예술부락’보다 2개월 먼저 창간했다. 1991년 ‘학산문학’ 창간좌담회에서 김차영은 문예탑 창간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광복되던 날 밤에 저는 쇠뿔고개(창영동) 조금 못 미쳐 영화학교에서 철로변으로 가는 쪽에 있었던 송종호의 집으로 갔어요, … 아마 그날에는 8~9명 정도 모였을 텐데, 거기서 동인지 발간이 발기되었고, 약 일주일 뒤에 지금 기독병원 아래에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신문화협회’라는 걸 결성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약 한 달간이나 고생한 끝에, 골필로 써가지고 ‘문예탑’ ‘동화세계’ 등을 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모두 미쳤던 거지요.”

김차영은 1946년에 대중일보에 입사했다. 1946년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고, 한국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인천지부에 참여했다. 동양통신 기자와 대한상공회의소 출판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7년 시집 ‘현대의 온도’를 발간했고, 1969년에는 시집 ‘상아환상’을 발간했다. 1989년 시집 ‘얼굴, 그 얼굴들의 여울’을 발간했고 1997년 사망했다.

● 임영균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임영균은 1904년에 태어났다. 1915년에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 YWCA중학에 입학했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에서 활동했다.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는 겉으로는 문학과 운동을 표방한 친목회이지만 실질적으로 민족해방정신을 강조한 문학운동이었다. 이 친목회에서 활동한 임영균은 1919년 3.1운동 당시에 통신망을 절단하고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돼 1년여 옥고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임영균은 1922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26년 졸업 후 경성대학병원에 취직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인 1927년 인천에서 임치과를 개업했다. 문학청년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임영균은 연극에도 관여하는데, 진우촌, 정암, 고일, 김도인 등과 같이 칠면구락부를 창립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칠면구락부가 인천 연극계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칠면구락부 결성에 참여한 임영균은 연극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보겠다.

치과의사, 문인, 독립운동가이자 연극인이었던 임영균은 1954년 ‘주간인천’을 창립했고 이에 따라서 언론인 타이틀도 얻게 됐다. 인천석금은 주간인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재 발간되는 ‘주간 인천’은 순 민간인의 향토지로 임영균 군이 발행인이고, 대중일보와 인천신보에서 다년간 종사했던 김응태 군이 편집 책임자이며, 반민특위에서 엄정한 판단을 내렸고 청년 단체와 정당에서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던 권성오 군이 주간이다.”

인천석금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임영균은 인천의 순수 지역지로 주간인천을 창간했고 대중일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언론인 김응태를 영입해 야심차게 지역 언론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가족들의 기억에 의하면 임영균은 1956~1957년 ‘경기매일신문’을 설립했고 송수안을 부사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송수안의 대중일보는 제호를 인천신보로 변경했다가 다시 기호일보로 변경하고, 1960년에 경기매일신문으로 바꿨다. 따라서 임영균은 주간인천과 더불어 대중일보를 계승한 경기매일신문도 설립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다방면에 걸쳐 활동한 특이한 이력의 임영균은 또한 인천양조장 사장이기도 했다. 치과의사이자 다방면의 문화계에서 활동한 그가 양조장 사장이 된 것은, 그의 부인 최정순이 양조장집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기 때문이다. 임영균은 양조장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직원들이 양조장을 알아서 운영했다고 한다.

인천 언론에 족적을 남긴 임영균은 경기도 치과협회 회장, 로터리클럽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6년 사망했는데, 치과협회 회장시절에는 경기도치과의사회보를 발간하기도 했으니 다른 무엇보다도 언론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매우 깊었던 인물이었고, 인천 언론사의 중요한 인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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