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2)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대중일보는 인천 향토지였으나, 1945년 창간 당시 인천은 한국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는 주요 도시였기에 다른 지역 일간지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은 대중일보의 기사에 반영된 인천의 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항장으로 개화기 시절 신문물이 가장 먼저 상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천에는 다른 도시보다 먼저 미군정이 실시됐다. 일본이 물러가고 난 이후 새로운 세력인 미국이 한국에 진출하는 관문 도시가 인천이었다.

이런 측면이 반영돼 초창기 대중일보에는 인천 미군정 장관인 스틸맨 소령에 관한 기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대중일보는 창간사에서 ‘일제의 압제를 지적하면서 해방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져있기에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인천이 수도의 관문이고 공업의 심장부이기에 대외 교역이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융성할 것이므로 대중일보는 국가의 성장과 함께 성장하면서 불편부당하고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있다.

대중일보 1호의 창간 축사는 시인 임화가 썼는데, ‘자유언론의 사용’이라는 제목 하에 조선의 서쪽 관문인 인천에 자유의 소리를 전하는 신문이 탄생한 것을 축하하면서 인천이라는 도시의 중요성을 적시하고 있다.

축사는 인천이 해외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는 관문이 되기에 신문이 담당해야 할 정치적 문화적 역할이 중대하다고 지적하며 따라서 인천의 언론은 부여된 언론 자유를 적절하게 사용해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 대중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매진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대중일보 1946년 6월 23일자 신문 일부.(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중일보 1946년 6월 23일자 신문 일부.(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0월 8일자 신문에는 인천의 향토사학자이자 의사인 신태범 박사의 ‘향도 인천의 낭보’라는 축사가 실렸는데 인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글이다.

신태범 박사는 인천에서 신문이 창간됐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금치 못한다는 말과 더불어, 일국의 문화적 지위는 갖고 있는 언론기관에 의해 평가되는 것과 같이, 지방도 언론기관에 의해 평가되므로 대중일보가 건전한 발전을 거듭해 조선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우수한 신문이 돼 인천의 자랑거리가 돼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창간사와 축사가 신문이 지향할 방향을 제시하고,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해방 직후 어지러운 사회상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창간호 기사를 보면 당시 혼란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일본인 재산에 동결령이 내려져서 8월 9일 이후 매매는 무효이고, 따라서 부동산 매수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기사가 1면 톱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풍찬노숙 하는 500만 전재(戰災)동포를 구출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는 기사는,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재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음악회가 창영국민학교 대강당에서 열려서 입장료 수입과 의연금을 구제회로 전달했다는 기사도 있다. 역시 당시 어려운 생활상을 알 수 있고, 인천이 관문도시로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제가 36년 간 비위생적으로 방치해 녹물이 나오는 수도관을 미군정이 세척할 계획을 세웠고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 인프라 시설도 문제가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멸치를 배급한다는 기사 등 식량 문제에 관한 기사로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인천에 남아 있던 일본인 관련한 기사와 미군정에 관한 기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치권을 가진 미군이 일본인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관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10월 12일자 신문에는 미군정관인 스틸맨과의 일문일답 기사가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최대로 노력하겠다는 스틸맨의 답변을 보면 역시 시급한 문제는 식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인 학교를 접수해 개학할 것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자녀가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미군정에 청원했다는 기사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조선의 학교에서는 조선말로만 수업을 진행하니, 그래도 상관없다면 일본 학생도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미군정의 답변을 듣고 일본인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사에서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통쾌함이 묻어나온다.

대중일보는 스틸맨과의 대담에서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데,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의 교육문제도 언론이 관심을 갖고 의제로 이끌어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인천부를 제물포시로 개칭하고, 초대 제물포 시장으로 임홍재씨가 임명됐고, ‘제물포시청의 역사적 신발족(新發足)’을 알리는 기사에선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다.

행정과 관련한 기사를 비롯해 많은 기사들이 일제의 만행과 악행 그리고 비효율성에 대한 비난으로 기사를 시작하고 있는데, 해방 직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민족 감정이 기사 작성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대중일보는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했는데, 창간호는 2면을 발행했지만 2호부터는 1면만을 기사로 채우고 2면은 백지로 발행했다. 시설과 인력의 부족으로 원래 계획했던 2면 발행이 여의치 않았기에 1면만을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간헐적으로 2면 발행을 하다가, 2면을 모두 채워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1월 9일 34호 부터였다.

창간 후 한 달여가 지나서야 어느 정도 신문사의 체제가 갖춰졌다고 보겠다. 월 구독료 8원에 신문을 배달한다는 사고가 11월 9일자에 실렸고, 11월 11일부터 김도인의 소설 삼불당(三不堂)을 연재하며 신문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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