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대중일보는 창간 한달 후에 체제를 정비해 2면 발행을 확립하고 본사도 궁정동에서 본정 4정목 8번지로 이전한다. 또한 여기자를 채용한다는 공고도 내보낸다. 그러나 1946년에 접어들며 대중일보는 위기를 맞는데, 편집국장을 비롯한 기자들이 집단으로 퇴사를 한 것이다.

1946년 1월 13일자 사고에는 대중일보 소속 일련의 기자들이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했다고 고시하고 있다. 퇴사한 기자 명단은 편집국장 엄흥섭, 정경부장 손계언, 사회부장 이원창, 문화부장 김도인, 기자 박성원, 송종호, 서봉도의 7명으로 사실상 대중일보의 핵심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의 집단 퇴사는 신문의 논조와 관련해 경영진과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익 성향의 기자들과 중도를 유지하려했던 경영진과의 견해가 맞지 않았고, 이들의 집단 퇴사는 갑작스럽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것이라 생각된다.

퇴사한 기자들은 인천기자단을 창립해 활동하던 기자들로, 이들이 퇴사 직후 얼마 되지 않아 인천신문을 창간했기에 대중일보 경영진도 이미 예견했던 일이라 보인다.

기자들의 퇴사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의 서비스가 확충되면서 대중일보 뿐 아니라 인천의 신문 제작 환경은 1946년에 접어들며 개선되기 시작한다. 1946년 2월 5일 대중일보에는 인천합동통신사의 광고가 실렸다. 그동안 배달에 의존하던 통신서비스가, 경인 간 직통전화 개설로 인천합동통신사에서 매일 2~3회의 통신을 직접 발행하게 됐다는 광고이다.

대중일보 1946년 6월 23일자 신문 일부.(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중일보 1946년 6월 23일자 신문 일부.(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직통전화 개설 이전에는 통신을 배달하는 운송 수단의 연착 등의 사유로 제 시간에 통신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2~3일씩 통신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서비스 제공이 원활하지 못했다. 직통 전화 개설로 매일 오후 12시와 3시에 통신을 수신한다고 광고에서 밝히고 있다.

조선통신 인천지사는 4월 25일에 본사와 무선 송신을 개통했고, 조선전보통신사는 해외 통신사인 AP, UP와 특약을 맺고 9월 5일에 인천지사를 설립하여 서비스를 개시했다. 통신사 서비스가 확충되면서 신문 발행 환경은 한층 개선됐다.

대중일보는 일단의 기자들이 집단 퇴사한 이후 한동안 조직 정비에 혼란을 빚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46년 6월 4일자에는 발행인 최상철, 편집인 이동오, 인쇄인 이종윤으로 돼있으나 7월 26일에는 편집인이 송수안으로 바뀌었다. 이동오 편집국장을 7월 27일자로 의원면직하고 고문으로 위촉했으며, 8월 18일에는 편집국장에 고일이 임명됐다.

해방 직후 인천에서는 일본인들의 적산자산 처리 문제가 매우 중요한 화두였다는 것을 대중일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재산 동결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산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들의 필요와, 헐값에 재산을 취득하려는 한국인들의 수요가 겹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인 재산의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며 일본 자산을 취득하려는 사람들을 모리배로 비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집을 구하려는 탐욕자에게 철퇴를 가한다는 기사도 볼 수 있는데, 비어있는 일본 가옥을 무단으로 점거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당시 일본인 퇴거를 위해 역할을 하던 일본인 단체 세화회와 협력해 이들 가옥을 조사하고 증명서를 발급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시가 발급한 증명서가 있어야 일본인의 빈집을 사용할 수 있다는 고시가 있었는데 그만큼 혼란스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의 주택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여러 기사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데, 당장 머물 곳이 필요한 전재민들에게 주택을 공급하려고 하고 있으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에게 미리 돈을 주고 집을 몇 채씩 확보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과 서울의 부자들이라고 대중일보 기사는 밝히고 있다. 중국인들은 그렇다하더라도, 서울 사람들이 발 빠르게 인천까지 진출해 알짜배기 적산가옥을 여럿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비슷한 양상이다.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재산을 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정과 협력해 감시단이 발족해 일본인을 수색하고 있다는 기사에서는 패전국 국민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 일본에서 인천으로 건너왔거나, 아예 인천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봐야 연고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삶의 기반이 없으니, 한국에 남아서 살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고 있다는 기사에선 해방 직후 당황하고 방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의 적산가옥 등 재산 문제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은 그만큼 혼란스러운 정세를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대중일보를 퇴사한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인천신문이 창간 직후 휘말린 필화사건의 배경이기도 하다.

인천신문은 인천 미 군정청 적산관리국 공업과장 노재룡이 일본인 적산 가옥을 부정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인천 군정관에서는 이를 허위 보도로 규정하고 인천신문 기자들을 구속했다.

그만큼 적산 가옥의 처리 문제는 당시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였으며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 인천에서는 인천으로 몰려든 전재민들로 인해 빚어진 주택 공급 문제와 엮여서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1945년 창간 이후부터 1946년 대중일보 기사는 당시 어지러웠던 인천의 사회상을 살펴보게 해주는 중요한 사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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