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재단-인천투데이 공동기획|
인천 시민문화활동 현장을 찾아서 ①

손끝으로 여는 세상-시(詩)로 나눠요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을 기반으로 한 시민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민문화활동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투데이는 인천문화재단과 협력해 이 지원사업 공모에서 선정된 사업(단체) 13개의 취지와 의미, 활동 내용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한다.

인천투데이=조연주 기자 |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인 26일 아침. 인천 동구에 있는 헌책방 한미서점 나무책장들 사이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딘가 엉뚱한 생각들이 숨어있을 것 같은 서점 한쪽은 낯선 풍경이다. 사람들이 점판이 아닌 천에 점자를 수놓고 있다.

김시연 한미서점 대표. 
김시연 한미서점 대표. 

시각장애인과의 거리, ‘손끝’으로 이어볼까?

'한미서점(since1953)'은 동구 금곡로에 있는 헌책방이다. 사람들은 이 금곡로를 배다리 헌책방 거리로 부른다. 한때 40여개가 넘던 헌책방은 이제 5개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서점은 이중에서도 유일하게 2대째 운영하고 있다.

한미서점은 7월부터 ‘손끝으로 여는 세상-시(詩)로 나눠요’라는 프로젝트(이하 손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매달 한 번씩 모인다.

김시연 한미서점 대표가 인천문화재단 시민문화활동 지원사업 공모에 이 프로젝트를 신청했다. 김 대표는 취미로 자수를 놓다가 동글동글하고 볼록 튀어나온 자수(프렌치너트 스티치)를 어루만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마치 점자처럼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점자를 수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김 대표가 점자와 시각장애인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4년 전에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각장애인을 만나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도움을 주는 방법을 몰라 곤혹스러웠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의 삶에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천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은 지난해 기준 1만3733명으로, 장애인 인구의 9.6%를 차지한다. 이들의 이동권이나 생활권은 비시각장애인에 비해 상당히 열악하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이들의 길이 돼는 점자블록을 보면, ‘정지’블록이 있어야할 곳에 ‘보행’블록이 설치돼있는 등, 위험한 경우가 많다. 미관을 이유로 엉뚱한 색깔을 사용해 저(低)시력 시각장애인은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먹으려 해도 ‘음료’와 ‘탄산’으로 밖에 구분돼있지 않아 음료를 제대로 고르기 힘들다.

시각장애인의 삶과 그들이 처한 환경에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김 대표는 시각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점자로 편지를 쓰는 작업을 함께 하고 싶어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모집했지만,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이미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사회복지센터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시각장애인들에겐 한미서점을 오는 길조차 도전이라는 것을 늦게 서야 알았다.

김 대표는 관점을 바꿔 비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시각장애인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비시각장애인들에게 시각장애인의 삶을 녹여내고, 서로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자수라는 매개로 점자를 보다 즐겁게 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김 대표의 아이디어였다.

8월 워크숍에서 송암 박두성 기념관 소속 이용행 사회복지사가 강의하고 있다.  
8월 워크숍에서 송암 박두성 기념관 소속 이용행 사회복지사가 강의하고 있다.  

ㅈㅓㅁㅈㅏ, ㅏㄴㄴㅕㅇ?

올해 손끝 프로젝트의 소재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들이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출판을 원했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편을 손자수로 옮길 예정이다.

지난해 프로젝트에선 참여자들이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하나씩 골라 수를 놓고 액자로 만들었다. 한 문장을 자수로 옮기는 데도 오랜 시간을 썼다. 긴 문장은 3시간이나 걸렸다. 올해 참여자들은 한 사람 당 시를 두 편씩 써야하니, 실로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김 대표는 무려 650자에 육박하는 ‘별 헤는 밤’ 자수에 도전한다.

지난해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뽑아 점자로 수를 놓았다. 
지난해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뽑아 점자로 수를 놓았다. 

점자를 자수로 옮기기 위해선 우선 점자를 알아야 한다. 이날 진행한 8월 워크숍에선 송암점자도서관 소속 이용행 사회복지사가 점자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줬다.

점자는 가로 두 칸, 세로 세 칸 총 여섯 개의 점에 음각을 내 만든다. 비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묵자(=글씨)와는 읽는 순서와 쓰는 순서가 다르다. 마치 판화처럼 ‘ㅈㅓㅁㅈㅏ’라고 읽기 위해서는 ‘ㅏㅈㅁㅓㅈ’ 순으로 써야 한다.

초성, 중성, 종성을 한 글자 안에 배치해 완성시키지 않고, 옆으로 풀어쓴다. 가령 ‘점자’라고 쓰지 않고 ‘ㅈㅓㅁㅈㅏ’라고 쓰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묵자와 달리 지면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효율을 위해 자음 ‘ㅇ’을 쓰지 않는 특징이 있다.

손끝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점판에 점자를 찍고 있다.
손끝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점판에 점자를 찍고 있다.

참여자들은 코로나19 거리두기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워크숍을 이어갔다. 묵자의 펜에 해당하는 점판과 점필을 처음 잡아보며 어색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미 능숙하게 점자를 찍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점필을 처음 잡은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점자로 적어보았다. 이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를 연습하며 점차 새로운 언어를 익혔다.

서정적인 단어들로 소박한 삶을 담아낸 윤동주 시인의 글귀 속에는 ㄲ, ㄸ 등 된소리와 ㅄ, ㄶ같은 겹받침이 많이 등장한다. 강사는 이 점을 특히 신경 써 가르쳤다. 맨 앞에 수표와 된소리 기호를 넣지 않으면 다른 점자들과 헷갈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남동구에 거주하는 홍찬미(27) 씨는 평소 팔로우하던 한미서점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그는 “점자가 하나의 문자이자 의사소통 도구라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점자와 자수를 동시에 배울 수 있어, 두 가지 교육을 한 번에 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며 웃었다.

중구에 살고 있는 장해솔(10) 학생은 처음인데도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점자 용지를 채워갔다. 그는 “평소 점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번에는 방학이라 시간이 돼 참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해솔(10) 학생이 점필로 점자를 찍고 있다. 
장해솔(10) 학생이 점필로 점자를 찍고 있다. 

‘훈맹정음’ 정신, 다시금 아로새길 것

이들은 다음 달 워크숍에서 수놓는 법을 배운 뒤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완성한 작품들은 12월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그 이후에는 지난해에 했던 것처럼 점자기록집을 만들 계획이다.

인천은 점자를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당시 ‘맹인’이라 불리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송암 선생의 뜻을 다시금 인천에 아로새기는 것도 김 대표의 목표 중 하나다.

송암 선생은 1888년 강화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국립서울맹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글점자 제작에 나섰다. 4년 만에 ‘훈맹정음’을 완성하고 시각장애인들에게 글과 재활의 길을 열어주는 등, 19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각장애인들과 함께했다. 훈맹정음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다.

김 대표는 “야속한 코로나19로 전시 가능 여부도 아직 알 수 없지만, 프로젝트 참여자들과 함께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을 예정”이라며 “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완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 참여자가 윤동주 시인의 '소년'을 점자로 찍었다. (제공 한미서점)
한 참여자가 윤동주 시인의 '소년'을 점자로 찍었다. (제공 한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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