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사업가 모스 고종에게 부설권 허락, 1897년 3월 22일 기공식
2년도 안돼 일제에 부설권 넘어가... 조선 지배와 아시아 진출 수단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27년 전인 1897년 3월 22일 한국 최초 철도인 경인선 기공식이 인천 동구 도원역 인근에서 열렸다.

경인선은 1897년 착공해 1899년에 완공한 최초의 철도이며, 현재는 인천 중구 인천역과 서울 구로구 구로역을 연결하는 철도다. 인천역에서 구로역까지 철도 길이는 총 27Km이다.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가 기공식을 개최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일제에 부설권이 넘어가고 만다. (사진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공감)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가 기공식을 개최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일제에 부설권이 넘어가고 만다. (사진제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공감)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해 개통했다.

당시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Morse J. R, 출생연도 미상)가 고종(1852~1919, 향년 66세)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허락받아 기공식을 열였다.

그러나 경인선은 모스가 기공식을 연지 2년도 채 지나지 않고 일제에 부설권이 넘어가고 만다. 모스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조달을 실패한 게 원인이었다.

일제는 메이지유신(일왕 중심 중앙집권체제로 근대화한 개혁)을 단행하고 1870년대 후반부터 정한론(일제가 한반도를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후 청일전쟁(1894)에서 승리한 일제는 청나라의 한반도 간섭을 배제하고 본격적으로 조선 식민지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경인선은 일제에 있어 조선 지배와 아시아 진출의 수단이었다.

철도 개통시기에 조선인들이 이용하던 육상 교통수단은 우마차와 가마, 인력거, 말, 자전거 등이었다.

하지만, 경인선이 개통됐다고 이들의 삶이 바로 달라지지 않았다. 개통 당시 경인선 이용 요금은 매우 비쌌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1등 객실 요금은 1원 50전(100전=1원)으로 외국인과 귀족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2등 객실 요금은 80전, 3등 객실 요금은 40전이었다.

당시의 물가로 환산해 본다면 면포 1필이 1원 4전으로 1등실 요금보다 쌌으며, 2등실 요금인 80전은 계란 100개 값이었다. 3등실 요금인 40전은 닭 두 마리 값과 같았다.

그러나 철도의 보급으로 인해 사회 경제 중심이 개항장으로부터 철도 노선이 통과하는 신흥 도시와 정거장으로 옮겨졌다.

아울러, 철로가 어디를 지나느냐에 쇠락하거나 발전하는 도시가 생기기도 했다. 즉, 철도 산업은 개발, 인구 증가, 도시 촌락 개선 등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조선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철도로 인한 도시 성장 이익들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 침략 산업에 동원됐고 조선인들은 여전히 수탈과 유린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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