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62년 전인 1862년 3월 19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성들이 탐관오리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진주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진주 농민봉기는 1862년 조선 철종(1831~1864, 향년 32세) 시기 경남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다. 당시 경상우병사(경상도 지역 군대 사령관) 백낙신(출생연도 미상)과 진주목사 홍병원(출생연도 미상)의 가혹한 수탈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백성들이 들고 일어섰다.

19세기 조선 후기는 조선 정치 폐단이 극에 달해 많은 농민들이 봉기한 시대다. 진주 농민봉기는 국내 각지에서 발생한 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이었다.  (사진 제공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19세기 조선 후기는 조선 정치 폐단이 극에 달해 많은 농민들이 봉기한 시대다. 진주 농민봉기는 국내 각지에서 발생한 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이었다.  (사진 제공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조선 후기 사회는 삼정의 문란(토지세인 전정, 군역인 군정,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받는 구휼제도 환곡)으로 탐관오리들의 탐학과 횡포가 극심해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정치 기강까지 문란한 상황에 이른다.

진주 역시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목사 홍병원은 삼정의 문란 중에서도 환곡제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수탈을 일삼는다. 이때 이들이 불법적으로 수탈한 금액만 4~6만냥에 이르렀다.

정확한 현대 화폐가치로 변환이 힘들지만 당시 쌀 한섬은 5냥정도 했다. 즉, 4~6만냥을 쌀로 환산하면 8000~1만2000섬에 해당한다. 오늘날 쌀값이 1섬(80kg기준)에 약 20만원 정도하기 때문에 수탈 금액은 약 20억원 규모이다.

이 같은 탐관오리들의 전횡을 더 참을 수 없었던 진주 민초들은 유계춘(출생연도 미상~1862년)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부당한 권력에 봉기했다.

봉기한 민초들은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르고 낫과 호미 등의 농기구를 들고 관청을 습격하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그들의 세력은 점차 늘어나 수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 조정은 급히 안핵사(지방 사건을 담당하는 임시직책) 박규수(1807~1877, 향년 69세)를 파견해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이 과정서 백낙신 등 탐관오리들은 처벌로 귀향을 떠나지만, 봉기 주도자 유계춘 등은 봉기를 주도한 죄로 처형당한다.

그러나 농민봉기는 진주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주 농민봉기의 소식은 지역 각 고을로 펴져나가 조선 전역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1862년 임술년에 일어난 ‘임술농민봉기’이다. 이렇게 진주 농민봉기는 조선 전역에서 일어나는 임술농민봉기(1862)의 도화선이 됐다.

조선 정부 역시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봉기를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삼정의 폐단을 막고자 관리 관청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적 미봉책에 불과했고 탐관오리들의 수탈은 계속됐다.

당시 농민들은 진주 농민봉기와 임술농민봉기로 자주 의식이 크게 성장했으며, 이는 1894년에 발생하는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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