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3대 대첩(大捷)’
고려-거란 마지막 대전투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05년 전인 1019년 3월 16일 고려-거란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강감찬(948~1031, 향년 82세)의 귀주대첩이 일어났다.

귀주대첩은 제3차 고려-거란 전쟁(1018년 12월) 시기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 20만명과 소배압(출생연도 미상~1018)이 지휘하는 거란군 10만명이 귀주(평안북도 구성)에서 격돌한 대규모 전투다. 고려군은 이 전투에서 거란군을 완전히 격파해 고려-거란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강대국 거란의 패배와 고려의 승리로 동북아시아 질서가 재편됐다. 동북아시아는 고려를 중심으로 재편됐고, 인접한 나라들이 고려를 우러러 봤으며 서로 고려와 왕래하기를 청했다.

귀주대첩 기록화 (사진제공 전쟁기념관, 이용환)
귀주대첩 기록화 (사진제공 전쟁기념관, 이용환)

당시 거란은 1차 침입 때 담판에서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하자 강동6주(평안북도 압록강 하류 동쪽에 위치한 군사 요충지 6개)를 내줬는데, 이를 다시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2차 침입 때 거란은 개경까지 진입 했으나 고려 현종은 이미 없는 상태에서 고려 현종이 '거란이 물러가면 친조(親朝, 제후국 왕이 황제를 알현하는 것) 하겠다'고 하자 이 또한 지키지 않자 10만 대군을 일으켜 3차 고려 침략을 강행한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사 20만명을 대동해 거란군과 맞서 싸우게 한다.

강감찬과 거란군의 첫 격돌 장소는 강동6주 중 한 곳인 흥화진(평안북도 의주) 인근 위치한 강인 삼교천이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진군 경로를 예측해 삼교천에 매복작전을 계획했다.

거란군은 강감찬의 예측대로 삼교천을 건너려 하자, 매복한 고려군은 일제히 거란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거란군 사령관 소배압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수도 개경으로 진군한다.

하지만, 고려 개경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울러 거란군은 고려군의 청야전술(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을 없애 적의 보급을 차단)로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병사들은 이미 누적된 전투와 행군으로 지쳤고 보급마저 끊겨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거란군 사령관 소배압은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감찬은 침략자 거란군을 고려 땅에서 살려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을 섬멸하기 위해 평지에 해당하는 귀주에서 진을 치고 대회전을 치르기 위해 그들을 기다렸다. 귀주는 개경과 왕래할 수 있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거란군은 이곳을 지날 수 밖에 없었다.

거란군이 퇴각을 위해 귀주에 들어서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과 마주했고 양국의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오랜 행군과 전투로 지친 거란군은 고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고려군은 이 전투에서 거란군 약 10만명 중 9만명 이상을 섬멸해 대승리를 거뒀다.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맞췄고, 거란은 고려 정벌 야망을 포기한다. 이로써 고려는 여진 정벌(1104년)에 나서기 전까지 평화의 시대를 누린다.

서울 낙성대 위치한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제공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 낙성대 위치한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제공 한국문화원연합회)

강감찬, 귀주대첩 신화를 쓰다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은 기나긴 고려-거란 전쟁을 끝낸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당대 최강이라 평가받았던 거란 군사 10만명을 상대로 전투를 펼쳐 대부분의 거란군을 섬멸했다. 당시 거란군 10만명은 대부분 기병대로 구성된 정예병력이었다.

화약무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전쟁과 전투에서 기병대는 현대 전장에서 전차와 같은 위상이었다. 더군다나 거란은 유목민족으로, 기병대의 전투력이 매우 강했다. 

반면에, 고려는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정예병 대부분을 잃었다.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은 20만명이었지만 대부분이 질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징집병이었다. 

또한, 이마저도 거란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각 요충지역에 분산 배치돼 강감찬이 귀주에서 지휘한 병력은 20만명 보다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고려군도 기마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 현종은 2차 여요전쟁 이후 기병대를 양성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 시작되자 삼교천 전투에서부터 거란군을 상대로 매복, 기습 등게릴라 작전으로 전략적 우세를 점해 승리했다.

그는 항상 유리한 조건에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피해를 최대화 하는 전투를 치렀다. 강감찬은 이미 싸우기 전,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강감찬은 귀주에선 회심의 일격을 날려 고구려의 살수대첩, 조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우리 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3대 대첩’이라 불리는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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