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한양까지 점령한 '이괄의 난'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00년 전 1624년 3월 13일 인조(1595~1649, 향년 53세)반정의 공신 이괄(1587~1624, 향년 37세)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공신이자 무관 출신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조선 수도 한양을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이괄의 난 전개 상황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그날)
당시 이괄의 난 전개 상황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그날)

당시 이괄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군사를 대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경기·서울 이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중 최초로 수도 한양을 점령한 사례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공주 공산성까지 피란을 간다.

흔히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로, 인조반정의 주역임에도 1등 공신이 아닌 2등공신에 책정되고, 변방(북방, 평안북도) 관리직으로 인사발령을 받는 등 논공행상에 반발해 불만을 품은 것을 꼽는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이 주장은 부족한 점이 많다.

인조가 이괄을 북방으로 보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동북아시아 정치지형이 명·청(후금) 교체기였던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1575~1641, 향년 66세)과 다르게 대외정책으로 친명배금(명나라와 친밀하고 후금을 배척) 정책을 내세웠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명분 또한 광해군이 펼쳤던 중립외교(명·청 사이에서의 실리외교)가 명나라에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며 이를 비판한 것에서 기인했다.

이로 인해, 후금(훗날 홍타이지가 청으로 국호 변경)은 자신들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이로써, 후금과 국경선을 대치하는 북방의 중요성은 더욱 컸다. 인조는 이러한 이유로 무관 출신인 이괄을 북방(평안북도 영변)으로 보내 평안병사(평안도 지역 사령관)와 부원수를 맡게 했다.

즉 이는 인조의 ‘푸대접’이 아닌 당시 북방 정세를 고려한 전략적 인사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괄이 맡은 평안병사와 겸직한 부원수는 도원수(전군 사령관) 다음으로 높은 군사 관직이었다.

이괄이 난을 일으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을 향한 경계가 심했다. 이에 당시 조정은 반역 음모 혐의로 누명을 써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

문회(1586~1634, 향년 48세)를 중심으로한 권신 세력은 이괄과 그의 아들에게 역모를 씌운다. 인조는 ‘이괄 역모설’을 믿지 않아 이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괄의 아들은 의금부(국왕 직속 공안 기구) 관원들에게 잡혀 한양으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에 이괄은 아들이 역모에 연루 돼 죽게 되면 자신 역시 신변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아들을 압송하러온 의금부 관원들을 죽인 뒤,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이렇게 이괄의 반란은 권신들의 세력 싸움으로 인해 발생했다.

이괄은 평안북도서부터 파죽지세로 남하해 한양을 점령했다. 인조는 이를 피해 공주 공산성까지 피란을 갔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출생연도 미상~1624)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관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한양 근교에서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과 전투를 펼쳤고 각 도에서 모인 관군의 수적 우세로 인해 이괄은 대패한다.

이후 이괄은 경기도 이천까지 도주하나, 그의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이괄의 난은 끝이 났다.

이괄의 난이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으로 인해 한양이 점령당한 일은 조선 역사 최초였으며, 국왕까지 피란길에 올랐다. 이로 인해 집권층과 일반 민중은 큰 충격을 받는다.

또한, 이 사건으로 조선의 북방 군사 방어 체계가 무너졌으며. 이괄의 난 패잔병 일부는 후금으로 넘어가 항복하면서 불안한 조선 내정 상황을 알려 호란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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