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대 대첩’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31년 전 1593년 3월 14일, 권율(1537~1599, 향년 61세)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 3만명을 막아내는 대승 ‘행주대첩’을 이룬다.

당시 정명가도(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왜의 요구)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파죽지세로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행주산성 행주대첩도 (사진제공 문화재청)
행주산성 행주대첩도 (사진제공 문화재청)

그러나 명나라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조·명 연합군이 편성되자, 그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점령 주둔지였던 평양성(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해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에 전라관찰사였던 권율 역시 남하하는 명나라군에 호응해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한양 인근 행주산성(경기도 고양시)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한다.

조선군이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한다는 사실을 안 왜군은 대대적인 공격 준비에 나섰다. 이때 왜군의 군사는 총 3만명에 이르렀고 편제 부대는 7개였으며 왜국의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 향년 42세) 지휘하는 정예 병력이었다.

반면, 행주산성에서 주둔 중이었던 조선군은 권율의 지휘 아래 성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군사 수는 불과 3000명 남짓이었다.

1593년 3월 14일,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행주산성을 총공격한다. 왜군은 수적으론 절대적 우세에 있었다. 그러나 질적으론 그러지 못했다.

고니시가 대군 3만명을 믿고 섣불리 공격한 행주산성엔 화차, 신기전, 천자총통 등 조선의 각종 최첨단 화약 무기들이 왜군을 기다렸다.

그 결과 선봉에선 고니시의 제1부대가 궤멸 직전의 피해를 받았고, 그 뒤를 이은 제2·3부대 역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난다.

이렇게 조선군의 승리가 다가왔을 때, 전세는 급변한다. 왜군 제7부대가 서북쪽 성문을 뚫고 행주산성 내로 침입하고 말았다. 이에 권율의 조선군과 고니시의 왜군은 사활을 걸고 백병전에 돌입했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부녀자들까지 치마에 돌을 담고 투석전에 가담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아무리 권율의 조선군이라 해도 압도적 물량의 왜군을 상대로 유리한 전세를 유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화살까지 모두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처절한 전투가 이어지며 조선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충청 수사 정걸(1516~1597, 향년 81세)이 판옥선을 타고 행주산성 남쪽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화살 수만발을 보급한다. 권율의 조선군은 중요한 순간에 보급을 받아 사기가 올랐고 전세는 또 조선군 쪽으로 기운다.

왜군에겐 조선의 보급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화살을 보급하러 온 판옥선을 본 왜군은 혹여나 ‘충무공’ 이순신(1545~1598, 향년 53세)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일 가능성을 생각해 퇴각한다. 당시 왜군에게 이순신 장군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로 인해 권율의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군의 뒤를 추격해 왜군 100명 이상을 사살하며 행주산성의 전투는 대승을 거뒀다. 이렇게 행주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행주대첩으로 우리 역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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