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고려·거란 전쟁 주인공
고려 멸망 막은 구국의 명장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13년 3월 11일, 고려 양규(출생연도미상~1011) 장군이 제2차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 전투 중 장렬히 산화했다.

양규 장군은 1010년 발발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전장에서 산화한 불세출의 명장이다. 그가 없었다면 고려는 망했을 정도로 업적이 대단했다. 고려의 이순신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하는 양규(배우 지승현) (사진제공 KBS 고려 거란 전쟁)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하는 양규(배우 지승현) (사진제공 KBS 고려 거란 전쟁)

거란의 2차 침입 전까진 양규의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2차 거란 침입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다.

거란은 2차 침입 당시 군사 40만명을 동원해 양규가 지키고 있었던 흥화진(평안북도 의주, 산성)으로 진격한다. 흥화진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당시 양규가 지휘하던 군사의 수는 불과 3000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양규는 소규모 병력으로 거란의 맹공을 막아냈으며, 거란군을 일주일 동안 붙잡아 놓는다.

이렇게 거란군은 양규가 지키던 흥화진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하하면서 병력이 분산된다. 이로 인해 고려군은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반격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양규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서 거란의 맹공을 버틴 흥화진과 달리 타 지역은 전세가 고려에 불리했다. 또 다른 군사 요충지인 곽주(평안북도 곽산)는 거란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함락당했다.

곽주를 점령 후 거란군은 곽주에 군사 6000명을 주둔시키고 이동했다.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00명을 동원해 거란군이 주둔 중이던 곽주를 기습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주둔 중이던 거란군은 양규에 의해 모두 전멸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전쟁물자 보급이다. 곽주는 군사 식량과 말먹이 등 거란군의 병참 보급기지였다. 그런 곽주가 배후에 있던 고려 양규 장군에 의해 다시 고려고 넘어가고, 거란군은 보급로가 끊겼다. 

양규는 곽주를 탈환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포로 7000여명을 통주(평안북도 선천)로 피신하게 한다. 이후 거란군이 수도 개경(개성)을 함락시키고 오랜 원정으로 인해 철수(1011년, 1월)를 감행한다. 양규 이를 놓치지 않고 철수 중이던 거란군을 무로대(평안북도 의주 인근)에서 기습 공격해 거란군 2000여명을 궤멸하고, 고려 백성 3000여명을 구출한다.

양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고려 백성(포로)을 구하고 거란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애전(평안북도 선천 인근 추정)에서 싸워 거란군 1000여명을 사살한다.

그러나, 거란군 최정예 부대가 나타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을 포위했다. 양규는 거란군과 끝까지 싸웠지만, 화살이 다 떨어지고 누적된 전투로 군사 수까지 줄어 결국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이 당시 양규 장군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요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들이 피신할 수 있게 그가 대신 시간을 벌어주느라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양규는 2차 거란 침입 시기 거란군 약 7000여명 이상을 사살하고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구했다. 아울러, 후방 교란 전투로 거란군 본대 보급에 타격을 주는 등 거란군이 퇴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양규는 외교담판으로 1차 거란 침공을 막아낸 서희(942~998, 향년 56세)와 귀주대첩으로 3차 거란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948~1031, 향년 82세)과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위인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고자 끝까지 결사 항전하며 단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피땀 흘린 그의 모습은 군인의 표상이자 민족 성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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