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3.1 만세운동 격문 배포하다 1년 수감
보훈부, 지난해 죽산 조봉암 서훈 추서 시사

인천투데이=박규호 기자│인천 대표 정치인으로 꼽히는 죽산 조봉암도 105년 전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보훈부는 지난 죽산 조봉암에 독립운동가 서훈 추서도 검토한 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보훈부 관계자는 “박민식 전 보훈부 장관이 죽산 조봉암에 서훈 추서 시사한 이후로 검토하고 있으나 아직 사전 조사 단계”라며 “심사(심의) 단계 조차도 올라가지 못했기에 언론에 ‘이렇다’고 공개할 게 없다”고 밝혔다.

죽산 조봉암.(사진제공 인천시립박물관)
죽산 조봉암.(사진제공 인천시립박물관)

죽산, 3.1 만세운동 격문 배포하다 1년 수감

죽산 조봉암은 1899년 인천 강화군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운동가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년간 복역하게 된다.

조봉암은 3월 18일 시위에 참여하고 격문을 강화 읍내에 배포하는 일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활동했다.

이후 일제는 해외에서 활동하던 조봉암을 1932년 5월 1일 체포했으며 조봉암은 출소 후 딸 조호정을 6년 가까이 돌봐 준 문중 어른이 살고 있는 인천에 정착했다.

조봉암은 인천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별요시찰인으로 분류돼 일제의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이후 조봉암은 국내를 떠날 생각을 하고 상하이 동지에게 편지를 썼으나 일제에 발각돼 구금된 상태로 해방을 맞이했고, 1945년 해방 이후 조선 공산당을 떠나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죽산 조봉암은 1948년 남한이 단독으로 치른 5.10 초대 민의원(=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됐다. 제헌의원으로 한국 헌법 제정에 기여했고,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1950년엔 국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토지개혁 성과와 국민의 지지를 토대로 1956년 무소속으로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죽산은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으로 내걸고 30%가 넘는 지지(=216만표)를 얻었다.

이 같은 지지로 토대로 죽산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죽산에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죽산은 간첩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복권됐다.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보훈부, 지난해 죽산 조봉암 서훈 추서 시사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보훈부로 격상하면서 임명된 박민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이 죽산 조봉암 서훈 추서를 시사하면서 기대감이 모아졌다.

당시 박 전 장관은 “열린 자세로 죽산에 대해 한 번 재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죽산은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며 토지개혁 1등 공신 역할을 했다”며 “이것이 결국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기반이 됐다고 많은 전문가가 언급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진보당 사건 등 죽산의 정치적 행보 같은 부분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 죽산 서훈 추서와 관련 크게 진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죽산의 진정한 복권을 위한 출발점인 서훈 추서가 시급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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