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 심포지엄’
“죽산, 해방 전 인천에 머물며 현실 정치인으로 전환”
“헌법 1조부터 마지막 조항까지 검토한 헌법 기초자”

인천투데이=박규호 기자│“제헌 헌법을 만든 제헌 의원 중 한명이자 한국 농지개혁의 주역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오늘날 한국 경제의 토대를 설계한 인물이다. 죽산 조봉암을 재평가해야 한다.”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난 11일 죽산의 정치 사상과 삶을 다룬 '죽산 조봉암 평전 : 자유인의 길(저자 이택선,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출간)' 출판을 기념해 열린 ‘조봉암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모습.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모습.

‘조봉암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 심포지엄'은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소재 흥사단에서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민주당 김교흥(인천 서구갑) 국회의원 주최로 열렸다.

토론회는 오유석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겸 '죽산 조봉암 : 자유인의 길' 저자가 발제를 했다.

토론자로 ▲고중용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생 ▲김진흠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신동호 죽산 조봉암 어록 저자 ▲정보현(민주, 비례) 인천 연수구의원 ▲정예지(민주, 비례) 인천 부평구의원이 참석했다.

“죽산 조봉암, 한국 최초 경제개발계획 구상”

죽산 조봉암은 1950년대에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정치인이다. 이택선 교수는 "죽산은 국내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정치사에 평화통일을 주창한 최초의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았고, 2010년대엔 경제 성장 시작점인 농지개혁(토지개혁)의 주역으로 재조명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2020년대 들어 한국 최초로 경제개발계획 구상을 한 ‘계획경제론 진영’의 주요 일원으로 기술되기 시작했다"며 "한류가 세계적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토대가 사실상 건국 초기에 설계됐는데 그 바탕엔 죽산 조봉암의 분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냉전의 분위기가 누그러진 1990년부터 한국 사회는 죽산의 발자취를 복원하기 시작했다”며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중도파,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초대 내각 각료, 국회부의장, 진보 정치의 효시 등 많은 것이 죽산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죽산을 설명하는 많은 것들 중 죽산에게 변치 않은 본질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며 “이제는 죽산을 특정 정파의 정치인이 아닌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죽산의 해방 전 인천 시절은 현실 정치인 변모한 시기”

이택선 교수는 "죽산이 1939년 신의주감옥에서 나와 해방 전까지 인천에 머물던 시기를 두고 혹자는 ‘휴면을 강요당했다’, ‘개인적 삶에 매몰됐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시기가 죽산이 현실 정치인으로 변모하는 시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창했다.

죽산은 1899년 인천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죽산은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를 접하고 소련 유학을 거쳐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후 죽산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자신의 항일 운동 거점을 옮겼지만 결국 일제에 체포된다. 1939년 출소하기까지 약 7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옥 후 지인의 도움을 받아 고향인 인천에 정착한다.

이 교수는 "인천 정착 시기 죽산이 박헌영이 주도하던 공산주의 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일제 감시 아래 기업인으로 활동했다"며 "이 시기가 죽산이 인천에서 좌우파를 넘나드는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대중을 만나던 중요한 시기"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죽산이 해방 전 인천에서 머물던 시기는 그가 이상주의적 혁명가에서 탈피해 현실 정치인으로 변모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죽산, 헌법 1조부터 마지막 조항까지 검토... 헌법의 기초자”

이택선 교수는 "그동안 국내에서 깊이 조명된 바가 별로 없지만 죽산은 제헌 헌법 1조부터 마지막 조항까지 검토하며 헌법의 기초를 마련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며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이자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한 모습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특히,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으로 대표되는 노동권 조항(제헌 헌법 18조), 농지개혁 보장 조항(제헌 헌법 86조), 경제발전 성과가 골고루 분배되게 하는 국가의 역할과 공공성을 중시하는 경제 조항(제헌 헌법 84~88조) 등에서 죽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헌법 기초위원, 농림부 장관 등을 맡아 제헌 헌법 제작과 함께 농지개혁과 계획경제론을 관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8.15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한국민주당의 우파와 중도파 사이에 경제 정책론 대립이 존재했다”며 “죽산은 계획경제론 진영의 핵심 인물이었다.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경제론이 계획경제론과 경합하며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이어 “제헌 헌법을 기초하고 농지개혁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죽산을 비롯한 계획경제론 진영에 속했던 이들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산업화에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한국은 극도로 취약한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모습.
이택선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의 모습.

“죽산, 1954년 평화 통일 한국 최초로 주장”

이택선 교수는 "1954년 열린 제네바 회담의 주요 의제 중 하나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통일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었다"며 "비슷한 시기 죽산이 한국 최초로 평화 통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제네바 회담(1954 Geneva Conference)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0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등 19개국이 한반도의 평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진행한 회담이다.

이 회담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6.5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위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 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둘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의 평화 유지 가능성과 베트남 분단 협약에 대한 토의였다. 결과적으론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미국이 거부하면서 베트남 분단 협약만 논의됐다.

이 교수는 “1954년 무렵 미국과 소련 사이 냉전이 완화되자 조봉암은 ‘우리의 당면 과업’을 발표한다”며 “죽산은 이 때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과 대비되는 평화통일이라는 담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평화 통일론은 당대에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조봉암과 조봉암이 창당한 진보당의 핵심 공약으로 자리 잡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그러나 6.25전쟁이 1953년 7월 정전된 후 한국 정치 지형이 반공 주류로 변화되면서 죽산이 속한 경제계획론 진영은 왜소한 세력으로 전락했다”며 “그 뒤 (1956 대선 후) 조봉암 등 진보당 당직자 17명이 구속되는 진보당 사건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1959년 7월 31일).”고 전했다.

이 교수는 죽산의 삶이 감동적인 것은 죽산이 온갖 공포와 시련 앞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삶을 관찰했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죽산의 본질을 평가한다면 죽산의 정치 사상은 자유와 짝을 이룰 수 있다”며 “후대는 죽산을 한국 근현대사와 정치사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등 재평가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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