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왕이었다면 바뀌었을 조선 역사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26년 전인 1898년 2월 22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1852~1919, 향년 66)의 친아버지이자 섭정으로 그를 대신해 오랜 기간 실권을 쥐며 망조든 나라를 구하려 애쓰던 흥선대원군(이하응, 1821~1898, 향년 77세)이 눈을 감았다.

흥선대원군은 현재까지도 역사적으로 낮게 평가 돼 있는 인물로, 한국 근대사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시대의 비운의 개혁가이자 풍운아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 사진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흥선대원군 사진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철종 임금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의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했다. 흥선군은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졌다. 

고종의 나이가 어려 흥선대원군은 섭정(군주가 위중하거나 연령이 너무 어려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을 맡았다. 먼저 세도정치로 문란해진 조정의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했다.

그가 먼저 손을 본 대상은 비변사다. 비변사는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응하는 임시 군사 기구 였는데, 조일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을 치른 후 조선후기 국방 포함해 국정 전반을 총괄 최고 기구로 등장했다.

최고 권력기구 된 비변사는 세도정치와 부정부패 거점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고 행정은 원래대로 의정부에, 군사는 삼군부로 분할시켜 두 기구를 자신의 통제에 두고 개혁을 추진했다. 왕권 강화와 개혁을 위해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맞춰 인재를 등용했다.

또한, 교육기관이라는 원래 목적과 기능을 상실하고 세도정치 시기 부정부패 온상으로 전락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국내 존재하던 수많은 서원 중 주요 서원 47곳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 600여곳을 모두 폐지했다. 이 때문에 유림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아울러, 흥선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 등 3가지 국가 재정 수입)을 바로잡고자 했다. 먼저 토지세인 전정을 개선하기 위해 양전 사업(실제 사용 경작지를 조사하는 토지 조사사업)을 실시했는데, 국내 토지를 조사해 토지대장에 누락된 땅을 찾아 소유주인 양반한테도 공평하게 세금을 징수했다.

흥선대원군은 군정(군역을 지지 않는 16세~60세 남성들이 내는 조세) 개선 대책으로, 각 집을 단위로 포를 내게 하는 호포제를 시행했다. 이는 농민들이 양반들을 대신해 부담했던 군포를 양반들에게 동등하게 징수한 것으로 양반에겐 미움을 샀으나 양민들은 환영했다.

환곡은 가난한 사람들이 춘궁기 때 굶어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에서 운영한 빈민구제 정책이다.

그런데 이런 환곡마저도 부패한 관리들의 이득을 챙기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환곡제를 폐지하고 주민자치로 운영하는 사창제(민간에 곡식을 저장하고 대여해주는 방식)를 실시했다.

흥선대원군 평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흥선대원군의 흠으로 꼽히는 게 경복궁 재건이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자 임진왜란 시기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했으나, 막대한 공사비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는 것이다.

그는 경복궁 중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경복궁 재원 마련위해 걷은 돈)을 강제로 징수했고, 고액권인 당백전을 마구잡이로 발행해 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같은 비판 더불어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실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궁궐 중에서도 법궁에 해당했다.

즉, 흥선대원군에게 경복궁 중건은 무너진 왕실의 자존심과 권위를 바로 세우고 세도정치 폐단의 종말을 알리는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였다.  

흥선대원군하면 떠오르게 되는 쇄국정책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엔 무리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비판하는 이유는 대개 극단적인 외교 폐쇄정책으로 문호개방 시기를 놓쳐, 구한말 조선이 근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점을 꼽는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구한말 조선은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부터 신미양요(1871년, 미국의 강화도 침략)까지 서양과 전쟁을 치렀다.

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는 절대 친절하지 않았고, 항상 고압적인 태도로 함선과 함포를 동반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선 당시 흥선대원군은 외국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에 거리를 뒀다.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와 고종의 견제로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남용했고, 부정 축재는 도를 넘어섰다. 게다가 고종과 민비는 청과 일본 외세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였다. 부패한 조정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반기를 든 동학농민혁명군을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와 일본군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조선은 열강들에 의해 끌려다니며 국정 운영을 하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을 맛보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망조든 나라의 왕실에서 태어난 비운의 개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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