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뤼순 감옥에서 눈을 감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88년 전인 1936년 2월 21일, 역사로 시대 변혁과 자주독립을 주창한 시대의 혁명가이자 애국지사였던 단재 신채호(1880~1936, 향년 55세) 선생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신채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선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다. 그는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형이상학으로 빠져버린 성리학 중심 유교 사상을 질타하는 박은식(1859~1925, 향년 66세)의 영향을 받아 조선 유학의 한계를 깨닫는다.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를 저술해 조선 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같은 영향을 받아 단재 신채호는 보수적이고 사대적이며, 봉건적인 관습에서 탈피해 자주적이고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신채호 표준영정 (사진제공 한국전통문화포털) 
신채호 표준영정 (사진제공 한국전통문화포털) 

신채호 선생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같은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는 ‘황성신문’ 언론인,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언론 운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단재는 이순신(1545~1598, 향년 53세) 장군, 을지문덕(생물년도 미상) 장군, 광개토대왕(374~412, 향년 38세) 등 외적과 당당히 맞서 싸워 승리한 영웅들의 평전 서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8년엔 ‘을지문덕전’을 지어 민중에게 민족주의에 기반한 자주적인 사관을 전했다.

아울러, 단재 선생은 도산 안창호(1878~1938, 향년 59세) 선생과 신민회(1907년 설립한 항일 비밀 결사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국채보상운동(1907년 대구서 발생한 국권수호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단재는 1910년 대한제국이 경술국치의 수모를 겪자, 일제 억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후,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1920년대부터 신채호 선생은 "역사만이 살길"이라며, 본격적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다. 그는 실제 증거를 강조하며 철저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역사를 고증하고 해석했다.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방문하고 옛 우리 고토인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집필해 한국 고대사를 완성했다.

단재는 1920년대 중후반부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1928년 중국 텐진서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을 조직했다.

이후, 그는 조직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타이완 북부)에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순국했다. 

단재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서 민족에게 애국심과 자주성을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권침탈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자주적인 역사를 저술해 한민족 동포의 자주성과 민족의식을 고취 시키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단재의 민족주의적인 사관은 역사 연구가 곧,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의식으로 확장해 한국 근대 사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