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기 고구려의 마지막 불꽃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362년 전인 662년 2월 19일 고구려가 평앙성 인근 부근인 사수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했다.

사수전투는 당시 제2차 고구려·당나라 전쟁(660~662년)을 종결한 대회전(大會戰)으로, 고구려 대막리지(고구려 최고위 관직, 행정과 군사 총괄) 연개소문(생물년도 미상~665년)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당나라 사령관이었던 방효태(601~662, 향년 61세)와 임아상(생물년도 미상~662년)을 사살하는 등 당나라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이다.

사수전투를 그린 유화 (사진제공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정영렬 작가 )
사수전투를 그린 유화 (사진제공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정영렬 작가 )

앞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인 661년, 고구려 침공을 감행한다. 당나라는 고구려 수도인 평양으로 수군과 육군을 편성해 육지와 바다로 고구려를 압박했다.

당나라군은 지난 침략(1차 고·당전쟁, 645년)에서 고구려 요동 방어선(현재 중국 랴오둥 지역) 앞에서 고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에 당나라군은 상륙과 우회기동 등을 펼쳐 곧바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먼저 상륙해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나라 수군과 달리 당나라 육군은 당시 거란을 포함한 북방민족의 반란으로 인해 철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당나라 수군도 본국으로 철수를 시도했지만,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평양성 인근 사수에서 마주했다. 그렇게 두 대국이 전쟁 승패를 가르는 대회전을 시작했다.

연개소문은 퇴각 중인 당나라군을 궤멸시켰다. 당시 당나라 야전군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방효태와 임아상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특히, 방효태는 645년부터 고구려 원정에 참전 경험이 있는 명장이었지만, 그는 아들 13명과 함께 전투에서 대패해 전사한다.

사수전투의 정확한 교전 병력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를 참고하면, 방효태가 이끄는 전군이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에 전멸 당했다고 나와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을 앞세운 사수전투로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해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지배자임을 증명하고 수나라부터 시작한 기나긴 전란을 마무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전쟁 승리의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제국이 그렇듯 고구려 역시 내부에서부터 망조가 보였다.

실권을 잡고 있던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는 내부로부터 크게 균열이 생겼다. 연개소문이 맡았던 대막리지 직을 두고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인 연남생(634~679, 향년 45세)은 내분에서 밀려나자, 당나라에 투항하고 그의 동생 연정토(생물년도 미상)는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그 후,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에 멸망한다. 700년 역사 동안 만주를 호령하며 중국 왕조와 당당히 맞서던 고구려의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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