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남겼으나
기축옥사 주도해 약 1000명 숨지게 한 장본인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30년 전인 1594년 2월 7일,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등을 남긴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인에서 최대 권력을 누렸던 ‘권력 투쟁의 화신’ 송강(松江) 정철(1537~1594, 향년 57세)이 강화도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철은 조선 중기 우의정, 좌의정, 전라도체찰사(전시 군사·행정 최고 지휘관이자 사령탑)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그는 사화·당쟁이 이어지는 어지러운 시기에 파직·사직·유배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고, 그 자신이 사화를 주도해 약 1000명이 숨을 거뒀다.

현대에 만들어진 정철의 초상화 (사진제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현대에 만들어진 정철의 초상화 (사진제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철은 ‘동인 백정’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동인을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했다.

특히,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1591년, 정여립(1546~1589, 향년 43세)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시작해 동인을 비롯한 약 1000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때는 우의정 겸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숙청해 많은 원성을 샀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동인을 탄압하며 권세를 누린 것도 잠시, 정철은 기축옥사 이후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발생한 '건저의 사건'으로 선조(1552~1608, 향년 55세)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떠났다.

또 임진왜란(1592년)을 맞아 조정에 복귀해 다시 손에 권력을 쥐는 듯 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에서 우거하다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치가로서 정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는 기축옥사를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이 과정에서 어린 아이와 노파를 고문하는 등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였으며, 1000여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어 조선 사회와 조정은 퇴보했다. 이렇게 정철은 잔혹하고 악독한 정치가라는 과오를 남겼다. 

정철의 사람 됨됨이와 별개로, 문학가로서는 문체가 수려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관직 진출 전에 ‘성산별곡’을 지었고, 이후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어 문학 작품에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작품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관동별곡 같은 경우, 선조에게 지나치게 아첨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관람 때문에 벌어진 직무유기와 행정력 낭비를 자연 찬양으로 합리화해 작품 해석과 평가가 갈리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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