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4일, 미·영·소 3국 정상의 회담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향후 분단에 영향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79년 전인 1945년 2월 4일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이 보이던 무렵, 미국·영국·소련의 대표 3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 향년 63세), 윈스턴 처칠(1874~1965, 향년 90세),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향년 74세)이 흑해 연안 얄타 지역에서 나치 독일의 패전을 포함한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얄타회담’을 진행했다.

얄타회담에 참석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얄타회담에 참석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도 얄타회담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당시 일제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을 설득해 대일전 참전을 약속받았다.

그 결과 소련은 만주에 주둔 중이었던 일제 관동군과 전투를 치렀으며, 후에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이북지역에 남하해 소련 군정이 세워지고 한반도가 분단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미국이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인 이유는 만주 지역에 주둔 중이었던 일제 관동군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전쟁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기에 전선을 늘리는 데 부담이 있었다. 최대한 빨리 적은 피해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에 소련의 참전은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나 미 군부내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일제 상황은 1944년 10월 레이테 만 해전(필리핀 해역)을 기점으로 사실상 미군을 막아내고 전선을 유지할 전력을 모두 상실했다. 그렇기에 미군은 일제 관동군 전력 역시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 일제 패색 매우 짙어지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소련은 전쟁 막바지 승전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일전에 참전할 것이 명백했다.

하지만, 미 수뇌부와 합참은 생각이 달랐고, 결국 소련은 한반도 참전 대가로 38선 기준 이북 지역에 주둔, 미국은 38선 이남 지역에 주둔하며 지리적으로 한반도가 분단됐다.

아울러, 이념의 성격이 상이한 미·소 군정은 체제의 분단을 불렀다. 소련 군정은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고 미 군정은 자본주의체제를 수립했다.

이렇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형성하며 분단의 시초가 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의 극동아시아 인식을 읽는 데 실패했고, 전략적 오판을 범해 한반도 분단 빌미를 만들었다. 미국의 이러한 극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이해 부족은 1950년 1월 발표하는 애치슨라인 선언(미국 극동 방위선에 한국 배제)까지 이어진다.

얄타회담은 한민족을 비롯한 약소국, 소수민족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한 채, 강대국 중심의 입맛에 맞춰 세계 운명을 재단했다.

또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자국의 이익을 위한 강대국 정상의 첨예한 외교 대립이었다.

이는 향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해리 S. 트루먼(1884~1972, 향년 88세)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본격적인 냉전의 서막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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