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서 몽골군 격파
총사령관 살리타 사살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791년 전인 1233년 2월 3일, 고려 승려 김윤후(생물년도 미상)가 처인성(용인)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했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1232년 8월경 강화로 천도했다. 이에 몽골은 1232년 10월 2차 침입을 감행했다. 몽골의 2차 침입은 고려 정부의 천도가 몽골과 대결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한 몽골의 군사적 판단이었다.

용인 처인성 주변 전경 (사진제공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인 처인성 주변 전경 (사진제공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에 몽골군은 고려의 전 영토를 유린하기 위해 남하했고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처인성에 도착했다.

처인성은 작은 토성이었다.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비교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거주지,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고 성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소수 병력과 백성들과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 100여명과 다수의 부곡민들이었다.

김윤후는 백성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곧 펼칠 전투에 대비했다. 또 적들의 위치를 예상해 처인성 동문 밖 일대에 저격수 부대를 배치해 몽골군과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전투에서 김윤후의 전술이 빛을 발휘했다. 김윤후는 살리타를 정확히 저격했고 몽골군 총사령관 사살에 성공했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결국 고려 땅에서 물러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중원 왕조와 더불어 유럽 일부 지역까지 무릎 꿇린 ‘파죽지세’의 몽골군은 고려 정규군도 아닌 처인성 지역 백성들과 승병들에게 참패해 퇴각하는 굴욕을 맛봤다.

김윤후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해 조정에서 포상과 상장군(上將軍)을 제안받았지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이를 사양했다.

이후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성 전투(1253년)에도 참여해 승리를 이끈 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종6품의 섭랑장, 정3품의 상장군⋅병마사⋅추밀원부사⋅예부상서로 승진했고, 정2품의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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