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구한말을 예고한 민중봉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212년 전인 1812년 1월 31일 성난 민초를 이끌고 홍경래(1780~1812, 향년 32세)가 난을 일으켰다.

19세기 조선의 상황은 세도정치가 불러 온 정치 혼란과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가렴주구 등 사회적 모순이 만연했다. 특히, 홍경래가 난을 일으킨 지역인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방을 향한 지역 차별이 존재했다.

홍경래의 난 상황 연출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그날 유튜브 갈무리)
홍경래의 난 상황 연출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그날 유튜브 갈무리)

과거에 낙방한 홍경래는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고 생각했으며, 서북 지방 몰락 양반과 상인, 농민 등을 모아 난을 일으킨다. 당시 홍경래 무리의 규모는 2000여명이 넘었고 한때 평안북도 중심지 정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부분 농민이었던 홍경래 반란군은 시간이 지나자 관군의 수적·질적 열세에 놓였고 결국 진압 당했다.

관군은 반란에 참여한 자들이 항복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처형했다. 그 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농민층의 주도적 참여와 봉건 체제에 대항한 반봉건적 민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회 모순을 극복하려는 진보적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존재한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난은 구한말에 들어 본격적으로 대혼란을 맞이하는 조선 사회를 향한 일종의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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