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어려움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했기 때문”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889년 전인 1135년 1월 26일 (고려 인종13) 승려 묘청(~1135)이 서경(지금의 평양) 천도운동(묘청의 난)을 시작했다.

서경천도운동은 묘청 등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묘청을 포함해 서경인(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당시 정치적 혼란을 틈타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서경으로 천도를 주장했다.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1750년대 초 제작) (사진제공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1750년대 초 제작) (사진제공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아울러 이들은 ‘칭제건원(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과 ‘금국정벌’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수도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반란은 김부식(1075~1151)이 지휘하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당시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묘청은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창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묘청은 왕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서경의 권력 지위가 추락했고 고려 조정 권력 구조의 균형이 무너졌다.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다.

이에 고려 사회는 보수적으로 분위기가 흐르게 되면서 크나큰 모순과 폐단을 낳고 무신정변 발생의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서경천도운동을 두고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묘청이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김부식에게 패하면서 우리 역사가 사대적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은 한계점도 분명했다. 난을 일으킨 이들이 제시하고 추진한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했을 때 비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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