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인 서거 80주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1927년 일제치하 속 독립운동을 하던 이원록(1904~1944, 향년 39세)은 투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수감번호 264번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그는 ‘이육사’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을 보여준 저항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긴다.

오늘로부터 80년 전인 1944년 1월 16일,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시인 이육사 열사가 식민지배 속 민족 절개를 지키며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저항시인 이육사 열사 (사진제공 행정안전부 유튜브 갈무리)
저항시인 이육사 열사 (사진제공 행정안전부 유튜브 갈무리)

이 열사는 일제치하 속 한민족의 강렬한 저항 의지와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시로 표현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광야’, ‘절정’ 등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조국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는 저항 시인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 열사는 처음부터 시인은 아니었다. 그는 192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한 뒤, 조국 광복을 위해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 열사는 의열단 단원이 돼 식민 통치 기관, 일본 경찰·군인, 친일파를 처단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폭발물이 터져 일본 경찰 이 큰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폭발물을 설치한 인물이 잡히지 않자, 일본 경찰은 범인을 잡는다는 구실로 이 열사를 포함해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했다.

이후 이 열사는 반복된 옥살이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 열사는 의열단원으로서 무장 투쟁에 앞장설 것인지, 아니면 건강을 이유로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순응하며 생활할 것인지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열사는 글로 민족의식을 높이고 일제 저항정신을 일깨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때부터 이 열사는 문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열사는 조국 해방을 약 1년 7개월 앞둔 1944년 1월 16일, 독립운동 혐의로 중국 베이징 감옥에 투옥돼 옥살이를 하다 순국했다.

이 열사는 비록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지만, 그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글로 남아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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