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과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노동자

인천투데이=한수진 시민기자 |

인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본향(本鄕)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인천 부평에 국내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인 '새나라자동차'가 들어섰다. 1965년 신진공업사가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인수해 신진자동차를 설립했다.

그 뒤 1971년 신진자동차공업(주)와 제너럴모터스(GM)의 합작으로 GM코리아가 설립됐다. 다시 1976년 산업은행이 GM코리아 지분을 인수하고 새한자동차로 바뀌었다. 2년 후 1978년 대우가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했고, 1982년 대우자동차가 탄생했다.

대우차는 1992년 GM과 합작관계를 청산했다. 1994년 영국 IAD를 인수해 워딩 기술센터와 생산기술연구소를 설립했고, 1995년 체코 국영 트럭회사인 아비아(AVIA)와 폴란드 자동차 회사 FSO를 인수했으며, 1996년 우즈베키스탄과 베트남 현지공장을 준공했다.

1997년엔 전북 군산시에 종합자동차공장을 준공했고, 1998년에 쌍용자동차 인수합병까지 추진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에서 시작한 1998년 IMF 경제불황으로 국내 대기업이 빚을 갚지 못해 연쇄부도가 시작됐다. 대우도 2000년 부도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1년 GM과 채권단이 대우자동차 인수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GM이 다시 10년만에 들어와 대우차를 인수하고 2002년 GM대우(GM DAEWOO)자동차가 출범했다. 2011년 지엠대우는 현 한국지엠으로 이름을 바꿨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부평공장) 최규식(53세) 조합원과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곽동표(41세) 조합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현장이지만 정규직과 하청업체 비정규직으로 소속 노조가 다르다.

대우차노조부터 한국지엠노조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 사수와 해고자 복직 투쟁 그리고 IMF사태를 거친 후 구조조정 반대와 해외 매각 저지 투쟁, 비정규직 철폐 투쟁 등 수많은 이슈와 투쟁이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기자 말>

전국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과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두 사람은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전국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과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두 사람은 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천주교 부평노동사목과 청소년 문화마당 내일

최규식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3수를 했다. 군 면제 장기대기 중 기한이 지나 입대를 면제받았다. 그 당시 신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웃음).

25살 때인 1993년 6월 지인 소개로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동료들을 따라다니다가 산곡1동 성당 인근 골목에 자리한 ‘천주교 부평노동사목’을 알게 됐다. 부평노동사목에 가면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부평과 그 주변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었다.

서로 노동하는 현장이 달랐지만 비슷한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서로한테 위로와 힘이 됐다. 노동조합 조직 활동과 연대활동에 마음을 내는 법을 그곳에서 배웠다. 고니정밀, 아남반도체, 한국샤프, 현대페인트, 삼익악기, 콜트악기 등 숱한 노동자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얘기를 나누던 그 시절이 그립다.

곽동표 200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7년 고등학교 1학년 때 풍물패 동아리가 생겼다. 호기심에 가입했다. 청소년문화마당 내일이라는 곳이 동아리 활동에 필요한 장소를 빌려줬다.

자주 내일에 방문하다 보니 다른 학교 친구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함께 어울리면서 즐겁게 활동했다. 1998년에 내일에서 광주로 기행을 갔다. 부모님은 못 가게 했다. 부모님 몰래 토요일 학교를 마치자마자 교복 상태로 기행에 참가했다. 광주에서 알게 된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집에 와서 부모님께 많이 혼났다.

고3이 되선 대학 갈 생각에 수능시험까지 보고 원서도 제출했다. 그런데 집안에 등록금을 댈 만 한 돈이 없었다. 학자금을 대출받아야 했다. 그러다 대학 가면 분명히 데모 할 것 같은 상상을 하니 갑자기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문화마당 내일에서 만난 친구들과 대학 진학을 두고 여러 가지 고민을 나누었다. 내일은 내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준 고마운 공간이자 단체였다.

고졸 이후 전자기기 자격증 따려고 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병역특례 산업기능요원으로 2005년 말 병역 의무를 마쳤다. 2006년 2월 26살에 지엠대우 하청업체 노동자로 입사했다. 당시 지엠대우 부평2공장에서 최초의 SUV디젤엔진 차량 윈스톰을 생산하면서 직원을 많이 뽑았다. 1996년 신입 채용 이후 거의 10년만이었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

뿌무모(뿌리깊은나무모임), 자노회(자주노동자회), 소위원회 활동

규식 가장 좋았고 뿌듯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직장 친목회인 뿌무모(뿌리 깊은 나무 모임), 현장조직 자노회(자주노동자회), 그리고 부서 소위원 활동이었다. 조립2부 두 곳의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구는 매번 뿌무모 회원이 무난히 당선될 정도로 열정적으로 현장 활동을 했다.

현장조직 자노회는 '현장에는 민주노조 조국에는 평화통일' 기치를 세우고 활동했다. 회원 수는 적은 현장조직이지만 모두가 인정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했다.

소위원회는 각 부서의 독립적인 현장 조직이다. 부서 소식지를 자체적으로 만들고 현장에서 노조 대의원들과 노동조합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전체 소위원회는 그 수가 대의원과 상집간부를 합친 수보다 몇 배는 많았기에 위력은 대단했다.

각종 집회 때 경찰의 저지선도 소위원회 위원들이 뚫고 나갔고, 현장 투쟁 때도 회사의 탄압이 심해지면 소위원들이 막아냈다. 그 당시 활동하고 투쟁했던 동지들의 모습은 현장 활동의 모범이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그 이후 매주 목욕탕 정기휴일에 면회 오셨다

규식 조립2부 소위원회 활동 중 내가 맡은 역할은 소식지 발행이었다. 조립1부(동트는 새벽), 조립2부(일터의 함성)의 소식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편집위원으로서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선배 소개로 출판사 ‘작은책’이 주관하는 글쓰기 강좌를 들었다. 강좌를 들으며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다.

강좌 중 과제로 생활 글을 써보라고 했다. 고민 끝에 어머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입사 당시 이력서에 꼭 추천인을 기록해야 했다. 추천인이 신원보증을 하는 셈이다. 나는 어머니의 이웃한 아주머니의 남편 소개로 입사했다.

1997년 입사 당시 대우차는 임‧단협 투쟁이 한창이었다. 회사관리자와 조합원 간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원들은 관리자의 폭력을 저지하고자 규찰대를 조직했다. 각목을 하나씩 나눠주고 현장을 순회했다.

그 때 집에 들어가니 이웃한 아주머니가 어머니께 소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닌 나를 확인하고는 ‘너 그럴 수 있냐? 어떻게 아저씨 얼굴에 먹칠을 하냐’며 화를 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당장 회사 그만둬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노조 활동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회사가 내 노조활동을 빌미로 직접 어머니께 전화까지 했다. 그러자 정작 어머니는 오히려 당당하게 ‘그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맞대응하셨다. 이 글이 그대로 작은책에 실렸다. 어머니는 자식의 글을 읽어보곤 천천히 답장을 써내려 가셨다.

‘아들아 보아라’로 시작하는 편지글은 ‘엄마도 힘들었는데 더 힘들었을 아들을 생각하니 먹먹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의 편지글이 다시 작은책에 실렸다.

대우그룹 부도사태 이후 나는 2001년 대우차 해외 매각 반대 투쟁에서 나섰고 구속됐다. 부평노동사목에서 노동자를 돌보던 은숙 누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면회 오셨다. 너무 놀란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냐?’며 당장 풀어달라고 항의하셨다. 겨우 진정시키고 돌려보내야만 했다. 당시 목욕탕 일을 하셨던 어머니는 그 이후 목욕탕 정기 휴일인 매주 화요일마다 면회를 오셨다.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점심 때 비정규직노조 홍보하면 관리직이 집단구타

동표 조그만 전자부품만 만들던 작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큰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게 되니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큰 로봇들이 마구 움직이고 자동차를 2층으로 올려 보내는 등 공장 내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설렘은 잠시뿐 열악한 노동조건과 회사관리자의 일상적인 폭력, 그리고 언제 또 해고 될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1997년 외환위기 발생 후 정부는 IMF의 구제금융 지원 조건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즉, 비정규직 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회사는 하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형태로 직원을 채용했다.

2006년 지엠대우에 한꺼번에 신규 채용자가 부쩍 늘었다. 사내 하청 업체가 10개 정도 있었고 업체별로 100명정도를 고용했다. 회사는 쉽게 쓰고 버리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목표였다. 비인간적 삶을 강요받는 비정규직노동자의 처지는 정말로 끔찍했다.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노동행위에 맞선 저항의 불꽃이 서서히 올라왔다.

2007년 9월 2일 지엠대우 부평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금속노조 ‘지엠대우차비정규직지회’를 결성했다. 노조설립과 동시에 회사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점심시간에 노조 홍보라도 할라치면 관리직이 떼로 몰려와 집단으로 구타하는 폭력 사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다. 노조 설립 초기엔 정규직노조가 연대해주곤 했는데 나중에 점점 멀어졌다.

혹한에 고공농성 12년 지났지만 한더위에도 손 시리다

동표 금속노조 지엠대우비정규직지회(비지회)를 설립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2007년 10월 사측으로부터 조합원 35명이 해고됐다. 비지회는 끊임없이 지엠대우에 교섭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청인 지엠대우는 비정규직지회를 자신들의 교섭 상대 노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2년이 넘는 천막농성과 철탑농성을 이어갔다. 그래도 원청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2010년 12월 1일 유래 없는 한파가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지엠대우비정규직지회 조합원 2명이 지엠대우자동차 정문 아치위로 올라갔다. 지치고 힘들지만 다시 한 번 목숨을 건 절실한 고공농성 투쟁이었다. 비지회의 끈질긴 투쟁에 노동단체와 시민사회단체의 연대 투쟁으로 2011년 2월 극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됐다.

2007년 10월 지엠대우 비정규직지회가 해고된 35명의 복직을 외치며 천막농성을 한 지 1190일째, 정문 아치 위 농성을 한 지 64일째, 신현창 지회장의 단식 농성 45일째 되는 날이었다. 혹한의 추위와 맞서며 정신력으로만 버텨왔던 농성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을 나도 함께 견뎌냈다. 힘들었다기보다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투쟁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열심히 했다. 매일매일 투쟁 일지 같은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홍보했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한더위에도 손이 시리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과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최규식 조합원과 금속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곽동표 조합원.

지옥의 구덩이 대우차 해고노동자 복직투쟁 출석체크

규식 2001년 1월 대우차는 정리해고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회사의 계속되는 희망퇴직 권유와 정리해고의 불안 속에 떠나간 사람도 4400여명이나 되었다. 노동조합 중앙쟁의투쟁위원은 삭발투쟁으로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 결의를 다졌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중앙투쟁위원에겐 사전 구속영장과 수배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노조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2001년 2월 16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생산직 노동자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단행되고 말았다. 1997년 12월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된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 노동자 숫자였다.

공장 안에는 해고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깜깜한 밤, 하루 투쟁을 마치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그 시간에 경찰이 급습했다.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속수무책으로 연행되었다. 중앙투쟁위원이었던 나도 곧 구속됐다.

구속수감 후 첫 재판에 참석하려고 경찰호송차에서 내리는데 기다리고 있던 조합원들이 투쟁가를 불러주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2002년 5월 4일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 천주교 산곡동교회 피정의집에 있던 대우차노조 투쟁 대오에 합류하였다. 제일 괴로운 지옥의 구덩이에 빠진 순간이었다.

나의 역할 중 하나는 출석 체크였다. 어떤 조합원은 ‘어머님이 쓰러지셔서 누워계시고 부인은 집을 나간 상태이다’ ‘생계가 어렵다며 오전만 결합하면 안되겠냐?’ 여러 하소연이 쏟아졌다. 어려운 생활고에 닥친 조합원도 많았다. 그 앞에 ‘안 돼’라고 말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그렇다고 성실히 나오는 조합원도 개인 사정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견디고 있을 뿐이다. 계속 반복되는 일정과 각종 투쟁 집회를 조를 이뤄 매일 활동하였다. 출석 체크하는 마음이 괴로웠다. 노동조합 간부가 와서 출석부를 달라고 했다. 돌려받으려고 했을 땐 이미 출석부를 잊어버렸다고 하더라. 그 뒤 나는 명단을 발표할 때까지 투쟁 현장에 나가지 못했다. 잘 한 행동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때로 가더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노동조합은 해고자 복직 투쟁을 접고 사측과 교섭에 나서 노사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노동조합이 보낸 마지막 통첩이었다. 1차 복직자 180명 명단 중 100명 노동조합, 80명은 회사가 정리했다. 노조 집행부에 큰 배신감을 느낀 해고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을 부숴버렸다.

사람이 좋아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언제부턴가 좋은 사람들을 담고 싶어 사진을 찍게 됐다. 좋은 장비도 구비했다. 사진은 오래도록 순간을 간직할 수 있는 좋은 선물이고, 기록이 됐다. 지금까지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다.

그간 한국지엠 정규직노조와 관계가 좋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국지엠에 들어와 해고와 복직이 반복됐다. 2017년에는 어렵게 복직된 현장을 다시 정규직이 가져가면서 또 비정규직의 복직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때는 정말 심적으로 번 아웃(burn out)이 돼 심리 상담까지 받았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신분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본인들과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2015년 비정규직철폐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우연히 한국지엠 소속 깃발이 나란히 펄럭이는 사진이 찍혔다. 바램이 간절해서 일까. 그 사진이 자꾸 아른거린다.

2020년 정규직 노동조합이 원하청연대위원회실을 비정규직노조의 사무실 공간으로 내주었다. 작지만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는 산별노조의 힘으로 한국지엠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투쟁하는 멋진 모습을 찍고 싶다.

전국노동자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깃발.
전국노동자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와 한국지엠비정규직지회 깃발.

'탈 지엠'으로 가야

규식 한국지엠은 미국 지엠 본사의 결정이 절대적인 회사이다. 노동조합은 그래서 활동의 힘이 매우 약해졌다. 조합원은 ‘사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미국의 협박에 늘 고용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나는 지엠 자본에서 벗어나는 ‘탈 지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대세는 전기차이다. 전기차는 배터리가 동력장치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부품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굳이 지엠이라는 큰 자본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부평공장에서 전기차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한국지엠 사내 하청 비정규직이 대법원 판결에 승소해 전원 정규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년이 이제 5년 남았다. 30년이 넘는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열심히 투쟁했지만 실패한 활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한국지엠 부평공장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자동차공장이다. 이 역사를 간직한 자동차 생산 현장이 오랫동안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로 남을 수 있게 힘을 모으고 싶다. 그 힘을 모았을 때 그 힘이 100이라고 하면 100을 써서 1, 아니 0.1의 성과를 남기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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