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금속연맹 LT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과 이은숙 조합원

인천투데이=한수진 시민기자 |

연일 장마로 물 폭탄이 쏟아질 때였다. 퇴근 후 만남이라 많이 출출할 것 같았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인터뷰 주인공인 이성백(53, LT메탈) 씨와 이은숙(51, LT메탈) 씨가 도착했다. 반갑게 인사하고 저녁을 같이 먹었다. 김치가 그렇게 맛있었다. 인터뷰가 왠지 감칠맛 날 것 같았다.

LT(엘티)메탈은 희성금속이 사명을 새로 바꾼 이름이다. 희성금속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LT메탈로 바뀌었다. 이성백씨와 이은숙씨는 엘티메탈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고, 한국노총 금속연맹 엘티메탈지부 조합원이다. 인터뷰에서는 엘티메탈을 편의상 ‘희성’이라고 표현했다.<기자말>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과 이은숙 조합원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과 이은숙 조합원

창원 삼미특수강과 전교조 선생님의 추억

이성백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 경남 창원에 있는 삼미특수강에 취직했다. 입사 당시 삼미특수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설립 과정에서 해고됐고 치열한 복직투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조 조합원들의 지지와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노동단체에서 활동가와 조합원들이 연대 투쟁에 많이 참여했다. 그때 처음 ‘노동조합이 이런 거구나’하고 놀랐고,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매형 소개로 1994년 4월 희성금속에 입사했다.

이은숙 전교조 세대라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통해 노동조합이란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 선생님이 소위 민중가요와 사회적 이슈를 많이 알려주셨다. 그때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지인의 소개로 1991년 6월에 희성금속에 입사했다. 무엇보다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기대했다.

통근버스에서 서로를 알아보다

성백 막상 희성에 입사해서 일을 하는데 내가 일하는 곳은 밀폐된 부서였다. 유일하게 타 부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통근버스였다. 은숙 씨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통근버스에서 만났던 사람을 통해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과 더불어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펼치던 노동자 통일대 ‘백두’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은숙 1992년 희성에서 해고자복직 투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 활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소모임도 만들어지면서 투쟁 대오가 단단하게 커졌다.

그때 남편을 처음 알게 됐다. 성백 씨는 부서가 떨어져 있어 평소 만나기 어려웠다. 성백 씨 말처럼 통근버스에서 처음 봤다. 유독 멋있어서 한눈에 확 띄었다. 그렇다고 성백 씨가 남편은 아니다. 남편은 따로 있다(웃음). 노동자 통일대 ‘백두’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더욱 가깝게 지냈다.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

서울에 등장한 노동자 통일대 ‘백두’

성백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이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들이 좋은 강의가 있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갔다. 시국 강연회였다. 강의가 끝나자 동료들이 (나한테) 백두활동을 제안했다.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집에 갈 수도 없고 난감했다(웃음). 바로 백두 대원이 되겠다고 답했다.

사람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처음에는 노동조합 활동도 어려운데 통일이야기까지 확장하니 통일이란 말 자체가 낯설게 다가왔다.

시간이 점차 지나고 백두활동이 무르익으면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무렵 여름이 시작되는 6월부터 평화통일을 바라는 8.15범민족대회 열리는 날까지 인천대(제물포 캠퍼스)를 학생처럼 자주 드나들었다.

은숙 백두활동을 하면서 1994년 서울대에서 열린 8·15 범민족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부의 삼엄한 탄압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처음 참가하는 나는 두근거리고 떨렸다. 아마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서울대로 향하는 서울2호선 전철 안에서부터 긴장은 고조되었다. 청년 학생들이 전투경찰을 막아서는 틈을 타서 서울대까지 뛰었다. 정문 앞에 모여든 백두 대원들은 배낭에서 백두 조끼를 꺼내 입고 ‘백두’ 깃발 아래 600여명이 모였다.

백두 노동자들은 범민족대회에 참석한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기립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600명이 모여 본 대회가 열리는 서울대 운동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재야통일운동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통일대’ 이름으로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단체가 ‘백두’라고 했다. 그때 벅찬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민주노조를 꿈꾸다

성백 1995년 사측과 임금 교섭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노조는 조합원 총회를 열어 총파업을 결의 했다. 하지만 당시 노조 집행부는 오히려 회사한테 협조적이었다.

그런 노조 집행부를 보고 당시 교섭위원이었던 은숙씨의 남편인 이명경 씨가 계속 이의를 제기했다. 그 과정에서 노조위원장이 이명경 씨의 뺨을 때렸다. 그 사건 이후 민주노조를 열망하는 조합원들과 뜻을 모았다. 1996년에 이명경 씨가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은숙 회사는 노동조합위원장 선거가 민주파 후보와 경선으로 치러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당시 노조 집행부는 회사의 지원으로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조합원들의 선거운동을 방해하고 조합원을 회유했다.

그쯤 남편 이명경 씨와 언약식을 했다. 회사 총무팀 직원이 사진을 찍고 어떤 조합원이 참석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민주파 조합원들은 회사의 탄압과 어용노조의 회유를 뚫고 선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안타깝게 투표 결과는 7표 차이로 낙선했다. 하지만 모두가 놀랄 만큼 큰 성과였다.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은숙 조합원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은숙 조합원

그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다

은숙 1996년 노조위원장 선거 결과는 사측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다음 해 치러진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도 위원장 선출 선거만큼 치열했다.

대의원 선거 이후 관리직 직원 한 명이 사망했다. 회사는 인력 충원 계획이 없다는 명분으로 이명경 씨를 관리직으로 인사 발령을 냈다. 관리직은 노조 조합원 대상이 아니기에 당연히 모두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함께했던 민주파 동료들의 퇴사와 병가, 지방 발령 등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았다. 결국 남편은 사무직 발령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백 3년 후 1999년에 다시 노조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위원장 출마를 부담스러워했다. 조합원을 만나면 이제 민주노조는 희망 없는 거 아니냐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절실한 마음으로 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다.

백일도 안 돼 친정에 맡긴 애기... 지금도 미안해

성백 민주노조에 뜻을 같이한 조합원들이 많이 떠난 상태라 선거는 어려웠다, 하지만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준비해야 했다. 그때 아마 은숙 씨가 출산휴가 2개월을 끝내고 복직할 때였다. 백일도 안 지난 아이를 멀고 먼 고향 전남 친정에 맡겨놓고 선거운동을 함께했다. 그때를 잊을 수 없다.

은숙 사실 그때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를 맡기러 갈 때도 슬퍼 울었고 인천으로 올라오는데 가슴이 먹먹해 또 펑펑 울었다.

노조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약 3개월 정도 지나서 아이를 만났다. 누워서 뒤집기만 했던 아이가 잡고 일어나서 뒤뚱뒤뚱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울지도 않고 단번에 엄마인 나를 알아보고는 품에 안겼다. 먹먹한 감동이 확 밀려왔다. 어느새 훅 자란 어른애기가 돼 있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이한테 미안하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이끌고, 또 무엇이 그렇게까지 마음을 내게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성백 씨가 용기를 낸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던 것 같다.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과 이은숙 조합원
금속노조 LG메탈지부 이성백 조합원과 이은숙 조합원

부당노동행위 승소... 동료들이 연대해 줘서 가능

성백 1990년대만 해도 여성 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또는 결혼 후 임신하면 바로 퇴사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은숙 씨는 결혼 후 임신하고도 출근했다. 출산휴가란 걸 신청하고 다시 복직한 사람은 회사 설립 이래 은숙 씨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여성 조합원이 그 덕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은숙 1997년 결혼해서 1998년 12월에 출산했다. 배가 불러오는데도 출근하니까 비아냥거리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일하던 주안 공장으로 복직했는데 내 일 자리가 없어졌다. 회사는 자리가 없어졌으니 남동공장 검사부서로 가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또 주안공장 관리팀으로 발령을 냈다. 관리직은 조합원 자격이 없기에 관리직 발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당한 부서 이동에 항의하며 투쟁했다. 이후 이 사건은 재판까지 이어졌다.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재판부는 내손을 들어줬다. 승소했고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며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노동조합이 평소 회사와 협조적이었음에도 재판으로 이어진 이 일만큼은 내 편에서 함께 싸웠다. 무엇보다 같이 일하는 부서 동료들이 탄원서를 써주는 등 함께 연대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성금속의 살아있는 역사

성백 은숙 씨는 희성금속 민주노조 활동의 역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은숙 씨는 끊임없이 쟁점을 만들었고 법정 싸움도 벌이고 굵직굵직한 일들을 벌였다. 내가 1999년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고도 두 번 더 출마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은숙 씨가 옆에 있어서 가능했고 지금까지 나를 있게 한 힘이다.

꿈은 이어진다

은숙 지금 노동조합에선 나의 역할을 찾는 게 어려운 조건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지금은 조금 해방된 기분이다. 꼭 집단으로 발현되지 않더라도 개인이 자유롭게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세대를 넘어 편견 없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성백 노조 활동과 삶을 돌아보니 의지와 패기가 넘쳤던 시기는 10년 정도였던 것 같다. 나머지는 힘들기도 했고, 사람들이 떠나는 등 단절되는 시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때 힘들어했던 사람들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남아있다.

나에게는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한 역사도 아픈 손가락이지만, 진보정당 활동도 아픈 손가락이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고생했던 많은 사람이 있다. 지금은 정의당 서구지역위원회 당원으로서 힘이 되고 싶다. 큰 역할은 못하더라도 작은 힘이라도 보태서 민주노조를 건설해 만들고자 했던 길을 여전히 걸어가고 싶다.

사람의 사회 관계는 노동하는 데서 시작하고,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노동이 만듭니다. <인천투데이>가 노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노동 현장에서 연결되고 어우러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그래서 ‘노동하는 우리는 같이’입니다. 월 2회 연재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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