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72)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신문이 창간하고 5일 후인 1988년 7월 20일에 인천지역에서 또 다른 일간 신문인 ‘기호신문’이 창간했다. 인천신문은 경인일보 인천분실의 시설과 인원을 주축으로 창간했는데, 기호신문은 주간지였던 ‘경기교육신보’를 모태로 창간했다.

경기교육신보는 언론통폐합으로 인천의 신문이 모두 사라지고 난 이후, 지역의 소식을 전할 언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지역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해 만든 신문이었다.

정부 방침에 따라 모든 지역 언론이 1도1사 원칙에 따라 통폐합됐고 새로운 신문 창간은 불가능했기에, 교육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주간지로 허가를 받아서 1975년 10월 10일에 주간 신문으로 창간했다.

새로운 신문 창간을 불허한 언론 통폐합이 단행된 이후 국내에서 최초로 창간한 신문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경기교육신보는 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언론통폐합 이전 인천신문 논설위원과 신아일보 수석 논설위원을 지낸 김경룡이 사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해 창간했는데, 새로운 언론의 창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교육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워 창간에 성공한 특별한 사례였다.

비록 특수 주간지라는 형태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교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배경과 언론계에 투신해 구축한 다양한 인맥을 동원해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경기교육신보는 인천과 경기도 지역의 교육을 다루는 신문이라는 특수성을 명분으로 창간했으나 인천에 신문이 전무해 지역 언론의 필요성을 갈급하던 인천 지역사회의 입장에서는 크게 고무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인천에서 교육 분야 이외에 다양한 부분에서 의미 있는 신문의 역할을 수행했다. 원래 교육 주간지가 목적이 아니라 종합 일간 신문이 목표였기에 경기교육신보는 창간 이후 여러 차례 종합 일간지로 전환을 시도했으나 군사 정권에 의해 모두 좌절됐다.

기호신문은 김경룡과 함께 경기교육신보 창간에 참여했던 서강훈이 주도적으로 창간했다. 주요 임원진으로 발행, 편집 겸 인쇄인에 서강훈, 주필 겸 편집국장에 박민규, 총무이사 이강세, 기획이사 문형기, 논설위원 김영호·채훈·김태풍·장덕환 등이 참여했다.

기호일보 연혁.(기호일보사 홈페이지 갈무리)
기호일보 연혁.(기호일보사 홈페이지 갈무리)

인천신문이 경인일보의 시설과 인력으로 수월하게 창간할 수 있었듯이 기호신문도 경기교육신보의 시설과 인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단시간 내에 창간이 가능했다.

기호일보의 창간사를 보면 강자에 강하고, 약자 앞에 약해질 줄 아는 신문의 정도를 걷겠다는 다짐을 내세우고 있다.

인천신문 창간사가 지역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 기호신문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잃어버렸던 언론의 정도를 회복하겠다는 점을 더욱 강조했다. 창간사 전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서해의 지평을 열고 불어오는 갈바람과 파도의 뱃고동이 어우러져 연주하는 바다의 교향곡에 발맞추어 기호지방 1천만 애독자의 축복을 받으면서 새 시대의 총아 기호신문이 태어났다.

공정 책임 정론 진실의 사시를 내걸고 1988년 7월 20일자로 창간호를 낸 기호신문은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애에 지나지 않지만 그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사자의 포효소리 보다도 우렁찬 고고의 소리를 터뜨렸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기 쉬운 아류 중의 아류들에 대한 애독자의 혐오하는 눈초리를 어찌 낌새채지 못할 것인가. 불만은 쌓이고 쌓여 냉대를 가져오고 뜨겁게 들끓는 분통의 눈금인들 왜 가늠을 못할 것인가.

우리는 이 창간호를 내면서 딱 부러지게 애독자 여러분 앞에 약속해 둘 것이 하나 있다. 기호신문은 누가 뭐라 해도 일간신문이 꼭 지켜야 하는 성역과도 같은 신문도에 어긋난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뜻이냐 하면 기호신문은 불의의 강자 앞에 강할 것이고 정의의 약자 앞에 약해 질 줄 아는 신문 본래의 영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목소리의 박자가 높을수록 빛깔의 농도가 짙을수록 신문도에 한층 더 충실한다는 대목을 강조하느니 만큼 우리에게 헛된 약속이란 있을 수 없다. 영원히 퇴색되지 않을 빛깔, 하늘 빛 짙푸른 기상으로 서릿발 같은 차가움을 곁들이면서 창업의 정신과 창간호의 다짐을 착실히 지켜 나가려고 한다.

언론의 자유가 타의에 의해 되찾아졌을망정 새 시대의 물결에 편승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주어진 시대적 여건에 순응하면서 반성학도 참여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새 언론상을 갈망해 온 애독자들에게 있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곳저곳에서 엇비슷하면서도 조금씩 개성을 나타내는 새 얼굴의 신문들이 뻔질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좋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러나 기호신문의 탄생은 다른 신문과 판이한 관점의 측면을 지녔다. 구 공화당 정권의 유신체제가 굳혀지기 이전까지 인천시내에는 3개의 일간신문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발행 되고 있었다.

1도1사 정책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3개의 신문들을 하루 아침에 깔아뭉개 버린 이래 인천은 10여 년 동안 벙어리 도시로 탈바꿈 했었다. 이 벙어리 도시에 다소나마 숨통을 터 주어야겠다는 안타까움에서 드디어 결실을 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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