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7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방송은 수도권 방송권역의 중복 문제와 기존 SBS 서울방송의 견제 등 여러 이유로 애초 지역민방 설립이 어려웠으나, 인천의 소식을 전해줄 방송국을 절실하게 원한 인천시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어렵게 허가를 받아서 출범했다.

그만큼 인천방송에 거는 인천 시민들의 기대가 매우 컸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 종속적인 인천의 상황을 인천방송이 어느 정도 개선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의 뉴스를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인천방송이 다뤄 줄 것을 기대했고, 지역 사회를 감시하고 여론을 선도하며, 지역민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언론사로서의 기능에 대한 기대도 컸다.

인천 지역 사회에서 인천방송에 걸었던 이런 기대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정부에서 인천 지역 민방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던 당시 언론학계의 전반적인 의견도 인천지역에 독립된 민영방송이 자리 잡기에는 무리가 많다는 견해였다.

사실 서울 경기를 제외한 인천만을 대상으로 100% 자체 편성을 하는 민영방송을 유지하는 것은 인천시의 인구나 시장 규모로 볼 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시민들의 노력으로 방송국을 개국하게 됐으니, 시민들 입장에서는 서울 지역의 중앙 언론과는 차별화되고 지역에 밀착한 소식을 전하는 방송국을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인천방송은 이런 지역의 여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천방송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자체 편성 100%를 고수하며, 서울의 거대 중앙방송국과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국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방송국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인천이 인구 측면에서 전국 3대 도시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 규모로 볼 때 자체 편성에 따른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고, 필연적으로 시청권역을 서울과 경기 지역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따라서 인천방송은 가시청권역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고, 이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격이 인천 위주의 내용보다는 수도권을 염두에 둔 내용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런 인천방송을 바라보는 인천 시민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시민들의 노력으로 방송국을 설립했는데, 정작 인천방송은 인천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전국을 염두에 둔 방송의 성격으로 변한 것에 대한 실망이었다.

그러나 인천방송의 입장에선 인천 지역에 국한된 방송으로서는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지역 사회의 요구와 생존을 위한 선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인천방송은 처음 설립 당시 갖춘 시설의 규모가 인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규모라기보다는 수도권, 더 나아가서 전국 방송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한 규모이기도 했다.

초창기 인천방송은 제작비용을 최소화하며 화제성과 임팩트를 갖춘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런칭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IMF로 고통 받던 1998년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박찬호 선수의 경기 중계권을 독점으로 확보하여 방영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중계는 인천지역에 국한된 인천방송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하게 만들어준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시청권은 인천으로 제한돼 있었지만 케이블 등을 통해 사실상 전국으로 방송되었기에 인천방송의 인지도는 전국 방송 급으로 높아졌다.

메이저리그 중계와 더불어 인천방송은 여러 참신한 시도를 통해 기존 방송국과 차별화되는 선구자적인 프로그램을 여럿 선보였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기는 했지만, 피디 1인이 직접 6mm 카메라를 들고 기획과 촬영을 도맡아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시스템을 개척했다. 소형 카메라에서도 고화질이 가능한 촬영 기술의 발전을 적절히 활용한 선구적인 시도였다. 이후 이런 제작 시스템은 타 방송국으로 확산됐다.

또한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중계하는 시도를 통해 게임 중계방송을 처음 시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른 방송국에서 보기 어렵던 새롭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통해 상당한 인지도와 충성 시청자를 확보하며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성공적인 시도가 계속됐지만 상대적으로 인천 지역의 소식과 인천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에는 소홀해졌고, 지역 사회에서는 인천방송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인천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인천의 방송으로 어렵게 만들어낸 방송이 인천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보다는 수도권 방송으로 변질되는 모습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방송은 정부 정책이나 경쟁사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인천 지역 사회에 도움을 호소했고 그럴 때마다 인천시민들이 계속 나서서 방송권역 확대 등의 사안에 목소리를 내고 힘을 실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을 홀대하는 것에 대한 인천 시민들의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

방송권역 확대를 꾸준히 시도한 끝에, 2000년 3월 20일에 인천방송의 방송권역이 경기도로 확대됐고, 용인 광교산에 중계소를 설치하고 VHS 채널 4번을 할당받았다.

방송권역의 확대와 더불어 방송국 이름을 인천방송에서 경인방송으로 변경했으며, 서울지역으로 전파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천 계양산에도 중계소가 설치됐다.

방송권역은 확대됐으나 인천 시민들의 민심은 경인방송에서 떠나기 시작했고, 경영여건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