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9)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창간된 경기신문은 1973년 9월 1일 수원에서 창간호를 발행했다. 발행인은 홍대건, 편집국장 조창환, 부국장 오광철, 논설위원 김형희와 이창희, 업무국장 임상규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경기신문은 창간사에서 350만 경기도민의 여망을 담아 순수 향토지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1도 1사 정책에 의해 인천과 경기 지역의 유일한 신문이 된 경기신문은 1970년대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뤗으나,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며 사장 홍대건은 부정축재자로 몰려서 전권을 정부에 헌납하고 경영에서 물러난다. 경기신문은 1982년 3월 1일 제호를 경인일보로 바꿨다.

언론통폐합 이후 1970년대에 인천에 본사를 둔 언론사는 전무했으나, 경기신문은 1979년에 인천분실을 직영 체제로 설치하고 별도의 사옥과 인쇄시설을 갖췄다. 경기신문이 갖춰 놓은 시설은 1980년대 후반에 인천에서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1970년대를 지나고, 1980년에 접어들며 대한민국의 언론 환경은 다시 한 번 격랑에 휩싸였다. 박정희 정권이 궁정동의 총성으로 막을 내리고 곧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며 다시금 강력한 언론 통제가 시작됐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유튜브 동영상 '끝내 반성없이 떠난 전두환, 그가 자행한 언론탄압을 돌아보다' 갈무리.
민주언론시민연합 유튜브 동영상 '끝내 반성없이 떠난 전두환, 그가 자행한 언론탄압을 돌아보다' 갈무리.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언론 장악에 나섰는데, 그 결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은 언론에서 철저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

신군부는 언론 자유를 주장하는 기자들을 내란 음모 혹은 유언비어 유포 등의 혐의로 구속했고, 언론사 사주들을 회유·협박했다.

언론의 사전 검열 철폐와 언론 자유를 주장하던 언론인들이 대거 구속된 상황에서, 광주 관련 보도는 신군부의 지침에 따라 철저하게 통제됐다.

그 결과 대다수의 국민들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상황에 대해 알 수 없었고, 언론은 광주 시민을 폭도로 묘사하는 왜곡보도로 신군부의 만행을 은폐했다.

광주에서 자행된 만행에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저항의 표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신군부의 언론 통제의 최소한 항의 표시로 사설을 싣지 않고 신문을 발행했다.

반면 적극적으로 신군부를 지지하고 나선 언론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언론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광주 시민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폭도로 묘사하고, 비상계엄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사설을 싣기까지 했다.

신군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는 조선일보의 사세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80년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161억원이었다. 이 수치는 같은 해 265억원을 기록한 동아일보와 217억원의 한국일보에 훨씬 못 미치는 매출액이었으나, 5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완전히 역전됐다.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1988년 914억원에 달했는데, 이는 동아일보의 885억원과 한국일보의 713억원을 넘는 매출액이었다. 불과 8년 만에 조선일보의 사세가 급격하게 신장돼 업계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수치이다.

군부 독재 정권과 야합한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업계 리더가 됐고, 현재까지 메이저 언론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언론계의 불합리성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군부는 1980년 11월 12일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는데, 방송의 공영화와 신문 방송 겸영 금지, 신문 통폐합과 통신사 통폐합 등을 골자로 한 언론 장악이었다. 그 결과 KBS는 중앙일보 소유 방송국인 TBC를 흡수해 KBS2TV로 개편했고, 동아일보 소유 방송인 DBS도 KBS에 흡수됐다.

MBC를 소유하던 민간 주식은 5.16장학회(추후 정수장학회로 개칭) 소유 주식을 제외하고 모두 국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MBC는 공영방송이 됐고, 모든 방송을 국가가 소유한 공영 체제가 됐다. 종교 자본인 기독교방송(CBS)은 민간 소유로 남았으나, 보도 기능은 없어지고 선교 방송만 하도록 개편됐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통폐합은 언론사들이 발 빠르게 전두환에게 충성하게 만들었고, 가장 강한 충성심을 보여준 조선일보가 고속 성장을 하는 밑바탕이 됐다.

정권에 비판적 언론인들이 이미 구속되거나 해직된 상황에서 언론사는 생존을 위해, 또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정권에 충성했고,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권언유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언론 통폐합은 언론사의 거대 기업화를 촉진했고 언론이 공익보다는 이익을 우선시하는 산업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되는 부정적 풍토가 고착화됐다.

이 시기의 언론은 소위 '땡전 뉴스'라 불렸던 방송 뉴스를 위시해 언론 본연의 역할은 사라지고 오직 정권에 대한 충성 경쟁만이 존재하던 언론의 암흑기였다.

언론인이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심화된 권언유착의 유산은 지금도 남아있어서, 언론의 객관성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대통령 직선제가 받아들여지고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며 언론을 통제하던 일련의 제도가 없어지기 전까지 1980년대는 한국 언론사의 암흑기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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