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6)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는 부패한 언론인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언론 통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16 이후 1962년 6월 22일까지 체포되거나 재판에 넘겨진 기자의 숫자는 960여명에 달했고, 이들 중 141명이 구속됐다.

군사 정부는 다양한 형태로 언론을 통제했는데, 규제 강화로 인해 신규 언론의 창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신문사들은 조간과 석간 중 택일을 강요받았다. 이로 인해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조간신문이 됐고,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대한일보 등은 석간 신문이 됐다.

1964년에는 ‘언론윤리위원회법’이 국회에 상정됐는데, 법의 요지는 언론의 보도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계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통과됐는데, 군사 정권은 반대하는 언론사에 대해 구독 중지, 광고 중단 압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가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일이 다반사였고, 기자에게 테러까지 자행됐다. 결국 대부분의 언론은 군사 정권에 무릎을 꿇었다.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했는데,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던 박정희는 언론을 더욱 심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비판적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관련자들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하는 일이 속출했다.

1968년에는 비판적 기사를 작성한 신동아의 기자가 구속됐고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는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정정 기사와 사과문을 게재하는 등, 언론사의 수난이 계속됐다.

동아일보 기자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에 대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으나, 이를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다. 이것은 신문의 편집권이 신문사의 손을 떠나서 중앙정보부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 낙성된  사옥.
새로 낙성된 사옥.

박정희는 언론에 가혹한 통제라는 채찍과 더불어 특혜라는 당근도 제시했다. 신문사가 시중 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특혜를 줬으며, 차관 도입의 특혜도 제공했다.

조선일보는 당시 신문 사설로는 차관 망국론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호텔을 지을 수 있게 기획원에 압력을 넣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조선일보는 박정희 정권의 특혜를 받아서 1968년에 일본 차관 4000만달러를 들여와 코리아나 호텔을 건축했다.

당시 차관 도입은 경제개발을 위한 것이었기에 주로 기간산업을 위해 도입됐는데, 관광호텔 건립을 위해 차관을 낭비하는 것에 도장 찍는 것을 끝까지 반대한 경제기획원 실무 담당 과장 때문에 코리아나 호텔 차관은 실무자의 도장 없이 허가된 유일한 사례였다.

조선일보 뿐 아니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 주요 신문들은 1960년대 후반에 사옥을 신축하거나 증축했고 신문사의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박정희 정권의 채찍과 당근 정책에 순응한 이들 신문들은 메이저 언론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신문에서 광고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증가했는데, 1950년대에 20% 정도에 불과했던 광고 수익 비중은 1970년에는 거의 50%가 됐다.

언론사 뿐 아니라 각 기자들에게도 당근과 채찍은 적용됐는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기자가 있었던 반면, 당시 봉급이 박했던 기자들에게 ‘촌지’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촌지에 길들여진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는 기사를 작성하는 등, 언론은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1971년 12월 17일에는 정부로부터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기자만이 취재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프레스카드’제도가 시행됐고, 많은 기자가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지 못해 실직하게 됐다. 1971년 12월에 국내 기자 숫자가 7090명이었는데,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기자는 3975명이었다.

기자들의 숫자를 강제로 조정한 것에 이어서, 1972년에는 언론 통폐합이 추진됐고, 1도 1사 원칙에 따라 지역신문 11개가 폐간되고 지역신문 3개가 창간됐다.

이때 대구일보, 대구경제일보, 호남매일신문이 폐간됐고, 전라북도에서는 전북일보, 전북매일, 호남일보를 통폐합해 전북신문이 창간됐다. 충청도에서는 대전일보와 중도일보가 통폐합돼 충남일보가 창간됐다.

인천에서는 경기일보, 경기매일신문과 당시 인천에서 경기도로 본사를 옮겨간 연합신문이 통폐합됐고, 이 신문사 3개를 통합한 경기신문이 1973년 9월 1일에 창간됐다. 경기신문의 창간은 본사를 수원에 둔 연합신문이 주도하면서 경기도 최대 도시 인천은 졸지에 언론사가 한개도 없는 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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