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68)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1970년대의 언론은 암흑기였다. 박정희 정권의 강압적인 언론 통제 정책 일환으로 언론통폐합이 단행됐고, 프레스카드 제도로 기자들을 통제하는 엄혹한 시기였다. 언론은 철저하게 통제됐고,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은 자취를 감췄다.

1도1사 원칙에 따라 자행한 언론 통폐합 과정은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인 언론사 위주로 진행했고, 비판적 언론의 말살을 위한 계획적인 정책이었다.

인천과 경기도의 신문이 통합돼 수원에 본사를 둔 경기신문으로 개편되는 과정을 보면, 사실상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를 강제로 찬탈한 것이다.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이던 김형희의 글에 의하면, 1973년 8월 31일 신문사의 사장이었던 송수안과 자신이 중앙정보부 인천분실로 연행돼 군홧발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한 끝에 신문사 통합 문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론통폐합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기에,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은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10월 유신’을 선포했는데, 사실상 자신의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을 위한 것이었다.

10월 27일에 대통령 종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표했고, 이미 정권의 시녀가 된 언론은 박정희의 유신 헌법을 홍보하는 여론 조작 수단으로 이용됐다. 모든 신문의 1면은 유신 헌법을 지지하는 기사로 도배됐다.

신문뿐 아니라 방송도 유신 헌법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통계에 의하면, 유신 헌법이 발표된 10월 17일부터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단독 해설 218회, 유신 관련 좌담 398회, 유신 관련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 58회, 유신을 다룬 스팟 드라마가 1268회에 걸쳐 방송했다.

유신 관련 프로그램의 홍수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송 또한 정권 홍보를 위한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경인 제1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제공 인천시)
경인 제1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제공 인천시)

방송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선 것은, 신문 통제 못지않게 방송도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1973년 2월 16일에 소위 ‘유신 방송법’이라 칭하는 방송법 개정이 있었다. 개정 방송법의 윤리 규정은 방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개정된 윤리 규정에 의하면, 미풍양속이나 사회 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내용의 방송을 금지시켰고, 음악 방송에서도 광란적 리듬이나 선율이 담긴 것을 금지하게 했고, 심한 노출 또한 금지했다.

비판적이거나 비능률적인 요소가 있는 프로그램도 금지됐고, 청소년에게 해악이 될 우려가 있는 소재도 금지됐다.

개정 방송법의 윤리규정은 이렇듯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으로 규제가 가능하게 개정됐기에 결국 방송의 자율성은 완전하게 말살됐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만이 허용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통제가 이뤄졌다.

전방위적인 방송 통제는 보도 프로그램 뿐 아니라 방송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예를 들어 드라마는 국론 통일을 저해할 소재는 피해야 했고, 농촌에 TV 수상기를 보급해 정권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텔레비전 효자 캠페인’이 전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헌법 하에서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하는 것과 동시에 언론인에게 당근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론인들을 공직에 임명하고, 정계에 진출시켰으며, 이들 언론인을 다시 언론계로 복귀시켜 정권 홍보에 앞장서게 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정관계에 진출했다가 다시 언론계로 복귀한 언론인은 총 55명이었는데, 정관계로 진출했던 언론인 중 36.4%가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이 수치는 언론이 정권의 홍보 도구 역할로 전락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수치인데,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정책은 언론인이 정관계로 진출하는 것을 관행처럼 만들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고, 한국 언론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관행이다.

독재에 부역한 언론이 별다른 반성 없이 지금도 유력 언론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은, 언론이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형적 형태로 남아있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자행한 언론탄압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분야로 대중문화를 꼽아볼 수 있다. 사회 비판적 표현이 금지되고, 규제의 기준도 지극히 자의적 해석에 의해 이뤄지다 보니, 많은 대중가요들이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이 됐고, 따라서 대중 문화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는 심각하게 억압됐다.

소재의 선택이 매우 제한적이다 보니 대중 문화인들은 자체 검열로 사회성 있는 주제는 알아서 피하게 됐고,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호스티스 영화’와 ‘대학가요제’였다.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와 같은 호스티스 영화가 유행하게 된 것은 그만큼 소재에 대한 규제와 제약이 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능 있는 대중 음악인들이 금지곡과 대마초파동 등으로 활동이 중단돼 공백이 생겼고, 대학가요제가 이 공백을 메꾸며 인기를 끌게 됐다.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위해 실시한 1970년대의 언론 통제는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언론인이 권력 주위를 기웃거리는 나쁜 관행이 이 시기에 시작됐고, 객관적 비판보다는 특정 세력의 비호에 치중하는 한국 언론의 고질병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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