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산책(1)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북성포구를 나오면 바로 앞 도로가 월미도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많은 변화를 겪으며 현재는 간척이 많이 이뤄져 주변에 공장들이 들어서며 육지가 돼버린 일종의 육계도(陸繫島)이다.

1656년(효종 7)에는 강화도로 가는 제2의 피난길로 월미행궁이 지어졌으나, 월미도 동남쪽 설과 월미산 서북쪽 자락 설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월미도(月尾島)의 지명 유래

해동지도 영종진도에 그려진 월미도.(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동지도 영종진도에 그려진 월미도.(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반적으로 월미도는 한자의 뜻풀이 그대로 섬의 생김새가 달의 꼬리 모양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이름으로 볼 때 달의 꼬리 모양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월미도의 명칭을 시기 순으로 나열하면 <승정원일기>에는 ‘魚乙未島(어을미도)’, <비변사등록>에는 ‘於乙味島(어을미도)’와 ‘於味島(어미도)’, <해동지도>에는 ‘孽尾島(얼미도)’와 ‘月尾島(월미도)’, 외에도 <효종실록>에는 ‘濟物島(제물도)’가 <청구도>에는 ‘月星(월성)’ 등으로 적혀있다.

이렇게 볼 때 ‘어을미도’에 가까운 우리말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며 ‘月尾島(월미도)’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형 상으로도 월미도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기에 달의 꼬리 모양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기호일보> 2018년 11월 6일자 지면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얼’은 ‘얼다’와 같은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얼음이) ‘얼다’는 ‘섞이다’, ‘교합(交合)하다, ‘합쳐진다’는 뜻이다. 여기에 ‘미’는 ‘물(水)’을 의미하는 것이니 월미라는 명칭은 ‘물(미)이 섞이는(얼) 섬’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육지와 거의 맞닿은 곳에 있고, 바닷물이 이 섬을 타고 돌면서 섞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을 것이다.”

‘맥아더 길’ 표지석과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

‘맥아더 길’ 명예도로 표지석.
‘맥아더 길’ 명예도로 표지석.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

북성포구로 들어가는 대한제분 정문 대문기둥 왼쪽으로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3개의 상징물이 나란히 서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맥아더 길’ 명예도로 표지석이다. ‘맥아더 길’은 월미공원 입구에서부터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 이르는 1.9km 구간을 일컫는다.

한국자유총연맹 인천시지부가 2015년 7월 중구에 명예도로 지정을 신청해 10월에 중구로부터 지정 통보를 받고, 12월 2일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 안내비는 ‘맥아더 길’ 표지석 옆에 있다. 안내문을 보면 ‘이 지점은 1950.9.15. 새벽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원수가 전함 261척과 상륙군 미해병 제 1사단, 한국해병 제1연대를 진두지휘하여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3곳의 상륙지점(적색해안·청색해안·녹색해안) 중 한 지점임’이라고 해서 이곳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상륙지점 3곳에는 안내비가 같은 모양으로 서있다.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일 때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북한군의 배후를 쳐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구상으로 출발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시내에 폭격을 하는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시내에 폭격을 하는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처음에는 인천과 군산, 주문진 등 3곳을 대상으로 검토하다가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의 결정으로 인천이 최종 선택됐다. 물론 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공습은 9월 4일부터 매일 이뤄졌다.

9월 15일 새벽 5시, 미국과 영국, 호주, 프랑스 등 8개국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함정 261척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해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작전을 개시한다. 맥아더가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인천 해안 3곳에서 차례대로 진행된다.

적색해안에 상륙해 방파제를 넘는 미해병대.(출처 발도메로 로페즈)
적색해안에 상륙해 방파제를 넘는 미해병대.(출처 발도메로 로페즈)

선발 병력은 월미도 녹색해안(Green Beach)에 6시 33분에 상륙해 20여 분 만에 월미도 105고지를 점령했으며, 정오쯤에는 월미도 일대에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고 주변을 장악했다.

다시 밀물이 들어오는 오후 5시 32분 후발대인 미 해병 1연대가 지금의 미추홀구 낙섬사거리 일대 청색해안(Blue Beach)에, 5시 33분에는 미 해병 5연대가 동구 만석동 부근 적색해안(Red Beach)에 상륙했다.

이때 맥아더도 이곳 적색해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후 8시에는 국군 해병 1연대가 만석동 부근에 상륙해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맡았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완벽하게 매듭지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는 2017년 11월 15일에 제막식을 했지만 평시에 인천상륙작전만 생각했기에 또 뭔가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기념물이 하나 더 들어섰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전 사진을 찍다가 “어, 제2차 인천상륙작전이라니” 처음 접하는 또 하나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게 된다. 이에 1950년 10월 25일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 전쟁)을 표방하며 30만 명에 달하는 인민지원군을 투입해 대공세를 펼친다.

전세는 역전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1·4후퇴)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택 인근에서 저지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한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1951년 2월 10~11일 이틀간 북한군과 중공군에 점령당한 인천을 탈환하기 위해 함정 6척과 해군·해병대로 구성된 합동특공대가 상륙작전을 감행, 1·4 후퇴 이후 한 달여만에 인천을 재탈환한 작전이다.

원래 목표는 월미도를 포격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처럼 적군을 속여, 병력을 인천 쪽으로 유인해 서울을 재탈환하려는 작전이었다.

작전의 책임은 미국 해군 극동사령부의 제95기동부대장인 앨런 스미스가 맡았다.

그는 여러 차례 인천항에 진입한 경력이 있는 YMS-510정의 정장(艇長, 작은 함정의 우두머리)인 함덕창 대위에게 정찰을 명령한다.

그는 1월 27일 인천항에 기습 상륙해 포로 2명을 압송했고, 그들을 심문해 적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특공대를 구성한 뒤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건의한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 미국 호놀룰루항에서 백두산함에 무기를 장착하는 모습.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 미국 호놀룰루항에서 백두산함에 무기를 장착하는 모습.

그리고 2월3일 해군 장병과 국민 성금으로 구입한 한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 미국·영국의 순양함, 구축함 등과 함께 북한군 진지를 포격한다. 이를 계기로 인천항에 주둔한 북한군 포대의 위치와 화력 규모가 그리 강력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2월 10일을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날로 잡는다.

그런데 당시 해병대 병력은 덕적도를 중심으로 서해 각 도서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작전 개시일인 2월 10일 시간에 맞춰 제대로 집결할 수 없었다.

이에 백두산함의 노명호 함장과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병대 제2대대를 이끌었던 김종기 소령은 만조시간을 놓치면 안된다고 판단해, 인천 외항에 집결한 각 함정의 수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특공대 총 70여명으로 구성한 상륙부대를 긴급 편성한다.

상륙작전은 오후 5시 미국과 영국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시작한다. 특공대는 6시쯤 만석동 해안으로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7시에 뒤늦게 도착한 해병대 100명까지 만석동 해안에 상륙한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인천 방어를 포기하고 퇴각한다. 오후 9시에는 목표했던 국립중앙관상대(현 인천기상대)를 점령하고 내처 인천시청(현 중구청)도 탈환하고 태극기를 게양한다. 2월 11일 후속 부대가 도착하여 인천의 재탈환이 완료되며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마친다.

높이 3m의 ‘제2차 인천상륙작전 전승비’는 해병대를 상징하는 8각형의 화강암 기둥 위에 당시 참전한 함정과 해군·해병대를 형상화한 닻과 상륙군 청동 조형물로 이뤄져 있다. 또한 기둥 앞면에는 상륙작전을 하는 모습을 양각으로 새겼고, 뒷면에는 전투업적, 작전세력, 참전자 명단 등을 넣었다.

육지와 연결된 ‘월미도’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로 들어가는 연륙 도로.
대한제분 앞에서 월미도로 들어가는 연륙 도로.

대한제분에서 월미도로 곧게 뻗은 왕복 4차선 도로와 인도를 보면 왼쪽으로 제7부두, 오른쪽으로 공장들, 위로는 모노레일이 놓여있어 섬과 육지를 연결한 연륙 도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더구나 계속되는 간척사업으로 1970년대쯤 북성포구 십자굴이 완성되며 월미도 북쪽으로 공단이 조성돼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월미도’라는 명칭에서만 과거 섬이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인천항 앞에 있는 월미도는 일찍부터 군사기지로 각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1882년 임오군란이 끝난 후 일제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 조달하기에 적합한 월미도 북서쪽에 석탄창고를 세운다.

1889년 청나라도 뒤질세라 일제의 석탄창고 건너편인 월미도 동쪽에 석탄창고 부지를 마련했지만 창고는 짓지 않았다. 그러다 1894년 청일전쟁에 청이 패배하면서 일제는 이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짓는다.

이에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1896년 월미도 남쪽 지역 1만3400평(약 4만4297㎡) 규모 토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이곳에 부두, 석탄창고, 병원, 연병장,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한다.

인천항과 월미도를 잇는 군용철도.(중구 제공)
인천항과 월미도를 잇는 군용철도.(중구 제공)
인천항에서 월미도로 들어가는 돌제(突堤).(중구 제공)
인천항에서 월미도로 들어가는 돌제(突堤).(중구 제공)

한편 조선의 석유 제품 시장을 독점하려는 미국의 타운센드 회사는 월미도에 5백만 갤런 규모 석유저장고를 건설한다. 이후 1897년 월미도 동쪽에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설립해 조선의 석유 판매권을 장악한다.

1904년 제물포해전에서 러시아를 물리친 일제는 월미도를 통째로 군사 지역으로 지정하고,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짓는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1905년 12월 6일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군용철도를 준공한다. 그러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가 설치되면서 만조가 아닐 때마다 월미도에 정박하던 선박들은 더 이상 이곳에 정박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열차로 수송할 화물의 양이 줄어들면서 1917년부터 일제는 월미도와 육지를 잇던 철로 자리에 석축 제방인 돌제(突堤, 육지에서 바다로 길게 뻗쳐 나오게 해 만든 둑)를 쌓고,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해 유원지로 개발하면서 석탄창고를 철거한다. 그리고 1937년에는 돌제를 확장해 폭을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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