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산책(2)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일제강점기 행락시설, ‘월미도 유원지’

1910년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월미도는 더 이상 군사 지역의 역할을 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이에 인천부는 1918년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며 경인지역의 대표적인 행락지로 부상한다.

물론 이런 부상은 1899년에 개통된 경인철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월미도를 관광지화 하려던 인천부는 총독부 철도국으로부터 월미도의 철도 용지 396㎢(12만평)를 20년 무상 임대받아 도로를 정비하고 벚나무 등을 심는다. 그리고 월미도 북서쪽 해안에 모래를 깔아 해수욕장을 만들며 시설을 정비한다.

요시다 요츠사부 인천부 중심 명소교통도회 중 월미도 일대 관광지도.(1936,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요시다 요츠사부 인천부 중심 명소교통도회 중 월미도 일대 관광지도.(1936,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인천항에서 바라본 월미도유원지.(중구 제공)
인천항에서 바라본 월미도유원지.(중구 제공)

해수욕장이 유명세를 타자 일본인 사업자들을 중심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에 기존 위락시설과는 별도의 유원(遊園)회사 설립 문제를 타진한다. 그리고 1923년 3월 경인지역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월미도유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7월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탕 원조인 월미도 조탕(潮湯)과 해수풀장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월미도 유원지 전체를 관할하게 된다.

이후 여관, 별장, 식당, 매점, 해수욕장, 보트장 등도 조성해 월미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지로 명성을 떨친다. 월미도를 찾는 행락객들이 계속 늘어나자 1928년 조탕 맞은편에 3층 규모의 조탕호텔을 신축했으며, 1934년에는 조탕과 회랑으로 연결한 3층의 조탕별관을 신축한다.

월미도 유원지가 개장한 후 15여 년이 지난 1937년 6월에 용궁각이 들어서는데 조탕 서북쪽 바다 위에 세워진 요정이었다. 바다에 콘크리트 교각을 놓고 그 위에 일본식 목조건축물을 올렸다. 조탕과 회랑으로 연결했으며 바닷물이 들어와 만조가 되면 마치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월미도유원주식회사 사옥 겸 호텔.(중구 제공)
월미도유원주식회사 사옥 겸 호텔.(중구 제공)
월미도 조탕 외부에 만든 해수풀장.(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월미도 조탕 외부에 만든 해수풀장.(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34년 신축한 조탕별관.(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34년 신축한 조탕별관.(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이외에도 1923년에는 해수욕장 뒤 월미산 자락에 임해학교가 설립된다. 애국부인회 인천지부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가 공동으로 경영하고 인천교육회가 후원했다.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서양식 2층 건물로 경인 지역의 많은 청소년을 수용해 수영과 모래욕, 운동, 자유 연구, 학예발표, 오락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수영장, 텐트, 흑판, 탁자, 식기 등의 시설을 갖추고 학교의 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와 체제 유지에 필요한 규율과 정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광복 후 이 유원지 시설은 적산(敵産)으로 미군정에 접수된다. 그 후 1948년 지역 유지들이 ‘월미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시설을 개보수하고, 월미도 조탕을 재개장해 운영하며 옛 명성을 다시 찾고자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도 보지 못한 채 인천상륙작전 중에 안타깝게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1970년대에는 유원지였던 제방 주변의 바다를 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이 들어섰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월미도 유원지’의 아름다운 풍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남아있는 엽서 사진으로나마 당시 위용을 떨쳤던 유원지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1937년 서북쪽 바다 위에 세워진 용궁각.(인천도시역사관 전시)
1937년 서북쪽 바다 위에 세워진 용궁각.(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임해학교.(인천시 제공)
임해학교.(인천시 제공)
월미도 조탕 원경과 북동쪽 해수욕장.(인천도시역사관 전시)
월미도 조탕 원경과 북동쪽 해수욕장.(인천도시역사관 전시)

50여 년 만에 개방된 ‘월미공원’

월미산과 월미공원은 2001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2001년 9월 인천시가 국방부로부터 관리권을 인수해, 10월 13일 월미공원 개방과 기념행사로 시민에게 녹지를 개방했다. 2004~2007년에 월미공원 1단계 사업으로 한국전통공원을, 2005년에는 월미공원 전망대를, 2008년에는 이민사박물관을, 2008~2010년에는 월미공원 2단계 사업으로 월미문화관과 산책로 등을 조성했다.

실제 인천상륙작전의 항공기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인해 월미산 서쪽 산 사면은 거의 초토화된다. 그리고 상륙작전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월미산을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해 통제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거의 50여 년 동안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월미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도리어 복이 된다’고 오히려 군사보호구역이었기에 사람들의 때를 타지 않아 지금은 울창한 수림이 조성돼 멋진 산책길이 만들어졌다.

인천상륙작전 직으로 초토화된 월미도.(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인천상륙작전 직으로 초토화된 월미도.(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건립

그런데 문제는 현재 월미전통공원이 조성된 곳은 원래 민가가 있던 지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항공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해 마을은 불에 탔으며, 주민 100여명이 폭격과 기총 소사로 희생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 남짓한 월미도 원주민들은 월미도로 돌아오려 했으나 미군이 월미도와 인천을 잇는 다리마저 봉쇄했다. 그리고 미군은 마을의 집터를 도저로 밀어 마을은 흔적도 남지 않았으며 이곳에 미군부대 기지를 건설했다.

이에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진정서를 냈고,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다.

1970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 화해를 추구하는 신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군 감군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1971년 7월 20일 미군이 철수하며 한국 국방부에 인계했는데, 국방부는 땅을 전부 국유화하라고 통보하고 이곳에 해군 제 2함대 사령부를 주둔시켰다.

결국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 시절이라 주민들은 감히 항의할 엄두내지 못하고 여전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제물포 마당 입구.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제물포 마당 입구.

주민들은 계속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진상규명, 배상, 귀향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넣었으나 실현되지 않자, 1997년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월미공원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하고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2006년 귀향대책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했고, 2008년에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진실 규명 결정’, 즉 월미도주민이 입은 피해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상을 받지 못하자 월미도 원주민들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3년 11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소유권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피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며 국가승소(확정) 판결을 내렸다.

결국 월미도 원주민들은 진실화해위원회부터 받은 권고사항이 무산됐고 어떤 피해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7년 3월 7일 인천 지역 여야 국회의원 10명 ‘월미도 군부대 설치에 따른 월미도 이주자의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공동 발의했는데 국회에서 계류되다 입법이 무산됐다.

그러나 다행히 2019년 3월 29일 ‘인천시 과거사 피해 주민의 생활안전 지원 조례’가 인천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이 조례는 월미도 귀향지원 대상자에게 피해주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록 현재 생존자는 30여명에 불과했지만 거의 70여년 만에 월미도 폭격 민간인 희생자들의 보상 길이 열렸다는데 의의가 있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

그리고 조례에 의해 2011년 11월 2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월미도 원주민들의 넋을 기리는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를 월미전통공원 제물포마당 안에 건립하고 제막식을 진행했다.

위령비의 내용을 보면 “이 위령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권고에 따라 건립하였다”고 적혀있으나, 안타깝게도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 10명의 이름만 적혀있고 그 외 희생자 100명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이에 생활안정지원금을 받고 위령비를 세웠지만, 대책위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인 월미도로 돌아가고 싶어 하며, 과거 자신들이 살던 곳에 월미공원이 생긴 만큼 월미도 안에 대체 토지 마련을 원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과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조치 등을 적극 강구하라”는 말을 되새겨본다. 월미도 원주민들이 대체 토지를 받아 월미도로 귀향하지 않는 한, 아직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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