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7)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괭이부리마을에 처음 들렀던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사라진 묘도(猫島)의 이름을 가진 동네이기에 혹시나 묘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당시는 자료도 별반 없어서 동네에 직접 찾아가봤지만 묘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골목 곳곳에 굴 껍데기가 무더기로 쌓여있어 부녀자들이 굴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보금자리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괭이부리마을.(아파트 주출입구 머릿돌에 붙어있는 타일사진)
보금자리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괭이부리마을.(아파트 주출입구 머릿돌에 붙어있는 타일사진)

그래도 화수부두나 만석부두를 안내할 때 조금 돌아가지만 쪽방동네인 괭이부리마을을 가로질러 갔다. 당시에는 송현동과 송림동 등 인천의 쪽방동네가 많이 있어 이곳은 사람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괭이부리마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에 발간한 김중미 작가의 장편 동화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200만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이다.

‘괭이부리마을’의 형성

‘화도진도’와 1930년대 ‘인천’ 지도에 보면 묘도(猫島)와 포대지가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만석부두입구사거리 뒤쪽에서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길의 일대로 추정되는데, 1930년대 중반 조선기계제작소 공장 터를 닦으며 묘도의 산을 깎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이곳 일대를 원괭이부리마을이라 부른다.

1930년대 인천 지도. 지도 위에 묘도(괭이부리)가 표시돼있다.
1930년대 인천 지도. 지도 위에 묘도(괭이부리)가 표시돼있다.

현재 괭이부리마을은 1906년 일본인 이나타 가스히코(稲田勝彦)에 의해 만석동 해안이 매립되고, 1930년대 중반 주변에 대규모 공장 여러 개가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의 숙소가 지어져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며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1970~80년대는 일자리를 찾아온 이농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현재 남아있는 집들은 대부분 40년이 넘는 주택들이라 한다. 이러다 보니 계속 주거환경이 열악해지며 원주민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면서 공가가 늘어났다.

결국 건물의 붕괴와 화재 등 안전사고 위험이 높아지면서 원주민들이 소중한 삶의 터전을 잃는 소외된 마을이 됐다. 이에 2013년 12월 괭이부리마을에 국비를 지원받아 전국 최초로 원주민 삶의 터전을 보전하는 전체 98세대의 임대주택인 보금자리아파트를 2동 짓게 된다.

2013년 지어진 ‘희망키움터’ 건물과 괭이부리소공원.
2013년 지어진 ‘희망키움터’ 건물과 괭이부리소공원.

아파트를 건설하며 한편으로는 원주민의 안정된 주거 정착을 위해 2013년 6월 지상 4층 규모로 ‘희망키움터’를 만들고 개소식을 했다. 이곳에는 공동작업장이 설치돼 주민들에게 부업으로 일자리를 마련해줘 비록 적은 액수지만 수익을 창출하게 했다.

이외에도 굴막공동작업장을 설치해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했으며, 2015년에는 괭이부리마을 주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우리미술관’을 개관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런 결과 괭이부리마을은 도시재생사업 분야에서 우수사례로 평가를 받아 국내 여러 지자체에서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많은 방문이 있었다.

요즘은 인천에서 거의 마지막 남은 쪽방촌이라고 알려져 사진작가들이 골목길 풍경을 찍으려고 이곳을 찾고 있으며, 옛 쪽방촌의 모습을 공부하는 건축과 학생들이나 연인들, 1970~80년대 도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옛 쪽방동네를 추억하는 사람들, 체험학습을 하는 청소년들이 주로 이곳을 찾고 있다.

굴막공동작업장과 괭이부리마을 전경.
굴막공동작업장과 괭이부리마을 전경.
굴막공동작업장에서 굴 까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네주민.
굴막공동작업장에서 굴 까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네주민.

‘괭이부리의 유래’와 ‘호랑이굴’ 설화

사람들은 묘도(猫島)를 우리말로 괭이부리라 불렀다. 그 어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괭이(猫)’는 한자어 그대로 고양이로 해석하거나 고양이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로 말하기도 한다. ‘부리’는 ‘묏부리, 굼부리, 갓부리’ 등과 같이 산에서 부리가 들어간 명칭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봉우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부리’는 사전적 의미로 새 또는 짐승의 주둥이나 물건의 끝이 뾰쪽하게 된 부분을 일컫는다.

그래서인지 괭이부리의 의미를 보통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묘도(猫島)의 산이 고양이주둥이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묘도(猫島)가 바닷가에 있는 섬이어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랑이굴 설화를 반영한 조형물들이 괭이부리소공원에 있다.
호랑이굴 설화를 반영한 조형물들이 괭이부리소공원에 있다.
괭이부리마을 골목길 전경.
괭이부리마을 골목길 전경.

아무튼 만석동을 매립하며 묘도가 사라졌기에 어떤 해석을 따라야 할지 의문이지만 괭이갈매기가 많이 날던 섬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묘도(猫島)에는 호랑이굴과 관련된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편찬한 ‘옛날 옛적에 인천은’에 실린 내용을 요약해 본다.

“호랑이굴은 묘도 안에 괭이부리 근처에 있는 굴로, 어느 봄날 마을 아낙네 몇 명이 나물을 캐러 괭이부리산으로 갔다가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여자들은 굴 안을 살펴보기로 했고, 굴 안에는 새끼호랑이가 3마리 있었다. 그들은 호랑이 새끼가 귀여워서 만져보려 했는데,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 거렸다. 이에 놀란 여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나물바구니와 호미 등을 버리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그들이 놓고 온 바구니와 호미 등이 집 마당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제 새끼를 해하지 않아 고맙게 여기고 가져다 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일종의 동물 보은설화로 이곳 작은 섬에 호랑이굴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설화가 전국에 퍼져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주한 사람이 한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만석·화수 해안산책로’를 걷다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표지판.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표지판.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사업’은 지역주민의 접근이 단절된 만석동과 화수동 해안 인근의 주민들이 바다를 접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가족 단위의 친수공간 조성을 목표로 했다.

2020년 11월에 1단계 조성사업을 착공해 2021년 12월에 2단계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3단계 조성사업은 2028년까지 완공 시기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배를 끌어올려 작업을 하는 시설을 갖춘 조선소들 6곳이 자리하고 있어, 대체 부지를 마련해 이전하기 전까지는 해안산책로를 조성하기 힘들 것 같다.

2단계 공사가 끝난 곳으로 가려면 만석부두 입구 만석동 경로당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500여 미터를 가면 태항조선이 나온다. 이 태항조선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만석·화수 해안산책로가 계속 바다를 따라 이어진다.

안내 표지판이 붙어있고 길이 계속 이어져있어 길을 잃을 필요는 없다. 이곳 2단계 해안산책로는 주로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나 해체하는 회사들이 있어 쿵쾅거리는 소리나 용접을 하는 매캐한 쇳내음이 나기도 한다.

물론 이곳 해안산책로에는 배모형 전망대, 소규모의 즉석공연 야외무대와 관객석, 휴게소 전망대 등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 있어 잠시 쉬며 해안가를 구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을 걷다 보니 인천의 맨살을 바로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각종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삼광조선공업주식회사.
각종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삼광조선공업주식회사.
용접기로 선박해체 작업 중인 모습.
용접기로 선박해체 작업 중인 모습.
십자수로로 들어가는 해안산책로.
십자수로로 들어가는 해안산책로.

인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번듯하게 조성된 부두나 정비된 바닷가를 접하지만, 이곳은 선박을 건조, 수리, 해체하는 작업을 볼 수 있기에 어수선한 모습이지만 다양한 선박들과 작업하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1단계 공사가 끝난 곳으로 가면 그래도 이곳에선 바닷가의 낭만적인 풍경을 조금은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는 깔끔하게 정비가 돼있으며, 북항으로 왕래하는 선박들과 북성포구 쪽으로 들어가는 원목을 가득 실은 바지선의 모습이나 영종도와 물치도, 강화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파도를 형상화한 웨이브데크와 전망대, 포토존이 있어 사진을 찍기도 좋다. 웨이브테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계속 해안선을 따라 걷다보면 십자수로 건너편에 동화국제통상, 엠디에프제2공장, 북성포구와 대한싸이로 건물이 보인다.

배모형 전망대.
배모형 전망대.
웨이브테크와 포토존.
웨이브테크와 포토존.

북성포구 앞으로 해안산책로까지 한창 매립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어떻게 관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해안산책로 바다 쪽으로 난간이 설치돼있는데, 북성포구 매립지와 연결이 끊어져있어 아쉽다.

물론 나중에 연결될 것이라 믿지만 이곳이 연결되면 북성포구를 통해 인천역으로 바로 나갈 수도 있고, 월미도로 방향을 틀어 계속 걸을 수도 있다.

매립이 완료되면 매립지 중 10% 규모로 횟집, 수산물 판매점 등을 설치해 정식 '어항구'로 지정해 운영하는데, 이에 대한 비용 분담 비율 문제로 동구와 중구가 갈등을 겪고 있다.

인천시는 어항구 분담 비율을 절반씩 분담하자고 제안했지만 동구는 영업시설들이 중구에 기반하고 있기에 중구가 분담해야 한다고 하고, 중구는 동구가 매립지의 75.7%를 관할하므로 행정구역의 비율에 맞춰 어항구 분담 비율도 맞춰야 한다며 인천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서인지 올해 1월 준공 예정이었으나 아직도 제대로 공사를 끝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북성포구에 정박한 선박들과 엠디에프제2공장. 그 뒤로 월미산 전망대가 보인다.
북성포구에 정박한 선박들과 엠디에프제2공장. 그 뒤로 월미산 전망대가 보인다.
12-5 북성포구 앞 수로 매립지. 바닷가 난간이 매립지와 연결되지 않았다.
12-5 북성포구 앞 수로 매립지. 바닷가 난간이 매립지와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만석·화수 해안산책로’에 대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3단계 해안산책로 공사를 위해 6개의 조선소 대체 부지를 마련해 이전시키겠다고 하는데, 꼭 해안선을 따라서 산책로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소를 이전하는 것보다는 선박을 수리하거나 건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인천 해양산업의 한 축인 선박의 건조, 수리 및 해체와 관련해 생생한 현장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해양도시 인천만의 제대로 된 해안산책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