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6)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만석동(萬石洞)의 지명 유래

만석부두 입구 GS칼텍스 주유소 담장에 붙어있는 곡물 하역을 하고있는 인부들 사진.
만석부두 입구 GS칼텍스 주유소 담장에 붙어있는 곡물 하역을 하고있는 인부들 사진.

만석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부터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만석리(萬石里)라고 불렸는데, 일제 때인 1942년 인천부 만석정(萬石町)으로 이름을 개칭했다가, 광복 후 1946년 인천부 만석동(萬石洞)으로 다시 바꿨다. 이후 1968년 1월 1일 구제(區制) 실시로 인천시 동구 만석동으로 자리 잡아 지금에 이른다.

조창(漕倉)이란 전국 각 지방에서 조세(租稅)의 명목으로 납부한 미곡(米穀)을 수납해 경창(京倉, 국가의 수도에 설치돼 중앙 정부에서 지출하는 미곡 등 현물 재원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국영 창고의 총칭)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설치해 운영했던 국영 창고를 일컫는다.

고(故) 이훈익 선생의 ‘인천지지(仁川地誌)’를 보면 조창과 관련된 만석동의 지명 유래가 잘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세곶창(아산), 덕성창(익산), 법성포창(영광), 영산창(나주) 등 4개소의 조창은 곡창지대인 전라·충청지방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곳에 보관한 세곡은 조운선에 싣고 서해안을 통하여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 해협 손돌목을 지나 한강으로 올라가 용산창이나 서창에 적재하였다.

조운선들은 세곡을 인천의 만석동, 영종, 경서동의 난지도, 청라도 등에 적재하였다가 지정기일에 납품하였다. 만석동의 지명 유래도 수만 석의 정부미를 야적하였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야적장은 조창에서 수송해 온 세곡을 관의 승인을 받아 세금을 징수한 군현별로 일정한 장소에 적치하는 것이다. 야적장 바닥에는 섬피를 깔고, 볏섬을 줄지어 쌓은 다음 영으로 둘러 눈비에 젖지 않도록 했다.”

인천 북해안선과 지선인 만석부두선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이정표.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이정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제3정문을 지나면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오른쪽 건물들 뒤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공장 담벼락을 따라 굽은 길이 나온다.

대략 150미터 정도의 길인데 예전에 이곳에 화물열차가 다니는 철길이 놓여있었다. 1920년대에 인천역에서 인천제철(현재 현대제철)까지 부설된 북해안선에서 갈라져 나온 지선인 만석부두선이다.

1990년대 초에 이곳을 기행하고 안내할 때는 공장 담벼락을 따라 단층의 조악한 가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철길은 맞은편 건물과 가건물 사이 중앙에 놓여있었고, 철길 쪽으로 가게들이 좌판에 채소나 과일 등을 벌여 놓아 골목길이 매우 좁았다. 그래서 화물열차가 지나갈 때는 한쪽으로 비켜서 걸음을 멈췄던 기억이 있다.

1906년 일본인 이나타 가스히코(稲田勝彦)에 의해 만석동 해안이 매립되면서, 1910년을 전후로 만석동 일대에는 품질이 좋지 않은 소금을 끓여 재가공하는 공장인 제염소가 여러 채 들어서고, 아리마정미소(1919), 사이토정미소(1919), 아오키정미소(1925), 인천유리제조소(1928) 등 소규모의 공장들이 들어섰다.

이에 소금이나 미곡 등을 반출하기 위해 인천역에 연결된 북해안선을 설치한 것 같다.

이후 1931년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일제는 본격적인 군국주의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그래서 만석동에서 화수동, 송현동에 이르는 해안 약 99만㎡(30여만 평)를 매립해 중공업 위주의 공업지대를 설치했다.

이 계획에 따라 동양방적(1934, 동일방직), 조선기계제작소(1937,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도쿄시바우라제작소(1938, 일진전기), 조선이연금속(1941, 현대제철) 등의 공장이 들어섰다.

이 북해안선은 공업지대 화물운송을 했던 철도로 1999년까지 열차를 운행하다 중단했다. 그 후 계속 폐선로로 방치돼 여름이면 병·해충이 발생하고 범죄우발지역으로 퇴락해 지역주민들의 집단 반발로 2004년 철거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북해안선의 지선인 만석부두선이 놓여있던 골목길. 원괭이마을역은 없었다.
북해안선의 지선인 만석부두선이 놓여있던 골목길. 원괭이마을역은 없었다.

현재 만석부두로 연결하는 철로는 흔적도 남지 않았는데 공장 담벼락에 붙여 화단을 조성하고 길에는 철길을, 담벼락에는 기차와 바다, 숲, 하늘 등 자연 풍경의 벽화를 그려 과거 철길의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림은 꽤나 낭만적인 것 같지만 원래 다니던 화물열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여객열차가 그려져 있어 만석부두선의 옛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거기다 있지도 않았던 원괭이마을역과 만석부두입구역 역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 역사가 있어 여객들이 타고 내렸다고 오해를 할 것 같다.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만석부두로 가는 길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길.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길.
(주)한국기초소재 공장. 예전에 이곳은 바다모래를 쌓아놓는 야적장이었다.
(주)한국기초소재 공장. 예전에 이곳은 바다모래를 쌓아놓는 야적장이었다.
(주)한국기초소재 공장과 낚시전문점.
(주)한국기초소재 공장과 낚시전문점.

만석부두로 들어가는 길은 좌우로 공장이 들어서 있어 전혀 부두로 가는 길 같지 않다. 들어가는 입구 쪽의 주꾸미가게들과 중간중간에 낚시전문점들이 없다면 초행인 사람들은 전혀 만석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길이 굽어 돌아가는 곳 오른쪽으로 1999년 법인을 설립해 시멘트를 제조하는 (주)한국기초소재 공장이 들어서 있다. 거대한 원통형 가마 2개가 눈길을 끈다. 이 공장이 서기 전에 이곳은 바다모래를 쌓아놓는 야적장이었다.

공장이 끝나는 곳에 주자장과 함께 만석부두가 나온다. 이곳도 예전과 다르게 많이 바뀌었다. 부두에는 인천수협 만석직매장과 인천해양경찰서 인항파출소 만석출장소 건물만 2동이 있다.

이곳은 1970년대 중반까지 작약도(물치도)와 영종도를 오가는 여객선의 선착장으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주로 바지락과 조개를 캐거나 주말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예전에 고철을 실은 배들도 이곳에서 하역을 했으나 2007년 북항 개발이 일부 완료되며 고철을 실은 배들은 북항으로 옮겨갔다.

만석부두 전경. 오른쪽이 북항이고 왼쪽에 영종도와 물치도가 보인다.
만석부두 전경. 오른쪽이 북항이고 왼쪽에 영종도와 물치도가 보인다.

올해 2월에 만석부두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바지락을 캐고 들어오는 어선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에 찬바람을 맞으며 2시간 정도 부두에서 오들오들 떤 기억이 난다. 이미 정박한 어선이 있어 굴과 게를 잡아와 정리하는 것을 찍으며 바지락 배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드디어 물살을 가르며 멀리 물치도와 (주)동부인천항만 사이 바닷길을 따라 배가 들어왔다. 아주머니 10여명이 모두 배낭을 메고 있다.

이른 새벽에 나가 뻘밭에서 작업을 하기에 필요한 물품들을 넣은 것 같다. 배 위에는 자루에 담은 바지락들이 하나 가득 실려 있다. 배를 정박하자 모두 일렬로 늘어서 바지락을 냉동차에 옮겨 실었다.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냉동차가 와서 연안부두로 가져가는 것이라 했다.

손발이 척척 맞아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모두 뿔뿔이 부두를 떠나는데 추위에 떤 시간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신기루를 본 느낌이었다. 이렇게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노고로 집에서 쉽게 바지락을 먹는 것 같다.

바지락들을 냉동차에 옮겨 싣는 모습.
바지락들을 냉동차에 옮겨 싣는 모습.

우연히 사진을 찍다가 만석유선협회 회장을 만났다. 작업이 끝난 사진을 찍어서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제대로 된 모습을 알 수 없으니, 날이 좋은 봄이나 여름에 같이 배를 타고 나가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배삯도 점심도 다 무료니 배 나갈 때 연락하고 오면 된다고 했다. 그래야 작업하는 분들의 노고를 제대로 알 수 있단다. 아무래도 따로 날을 잡아 취재를 하러 나가야 할 것 같다.

만석부두의 변모

조선시대 만석부두의 흔적은 일제 때부터 계속 매립된 관계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과거 수만석의 양곡을 야적했기에 매우 큰 부두라 추정할 뿐이다.

개항 이후 1885년에 이미 이곳에는 선상회사(船商會社)인 태평회사가 있었다고 하며, 정부는 1886년 6월 인천항 만석동에 부두를 쌓고 이를 내항으로 삼아 국내 상선을 정박하게 하고 외국선박과 뒤섞여 외항인 탁포에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는 국내 상선이 외국 선박과 뒤섞여 항구세를 포탈하는 것을 막고, 내항의 객주에게도 상업 이익을 보호해 주어 상권을 넓히는 한편 세금을 거두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만석동 선상객주들은 1887년 12월 선상회사를 설립해 인천항에 운송되는 화물의 중계 독점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육로 객상인 외항객주의 반발과 화물을 만석동에서 조계지 부두까지 다시 수송해야 되는 번거로움과 운송 부담 등으로 1892년 말까지 여러 차례 철폐와 설치를 반복했다.

만석부두의 곡물 하역 광경. 뒤로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공장으로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건물이다.(인천 동구 제공)
만석부두의 곡물 하역 광경. 뒤로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공장으로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건물이다.(인천 동구 제공)

이후 1906년 만석동 일대 해안이 매립되자 만석동 일대는 넓은 해안선을 따라 여러 공장이 들어서며 필요에 따라 공장 관계자들이 자체적으로 그리 크지 않은 부두를 축조했다.

<동아일보> 1938년 3월 15일자 기사를 보면 ‘조선 내 각 도시에 건물이 급격히 증가하여 건축 재목의 증가로 해마다 인천항으로 들어오던 통나무들을 저목장(貯木場)이 없어 월미도 제방 근처에 방치했었는데, 출입선박에 지장이 막대하여 만석동 해면과 육지에 저목장 설비가 들어선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당시 이곳도 화수부두와 마찬가지로 목재부두로서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화수부두는 땔감용 목재부두, 만석부두는 건축용 목재부두로 역할을 나눴다고나 할까.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1974년 인천항 제2도크가 완공될 때까지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는 인천항의 물동량 과다와 대형선박의 출입이 어려워 인천항의 하역장을 보조하는 부두로 사용됐다.

특히 만석부두는 한국전쟁 후 양곡 등 많은 원조물자가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주)한국기초소재 공장 오른쪽으로 마치 장화처럼 생긴 만(灣)이 있는데, 1960년대 중반까지 시멘트와 밀가루 등을 하역했다고 한다.

만석부두는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만석동에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부두노동과 뱃일을 제공하는 공간이었으며, 아낙네에게는 굴을 까는 작업장인 굴막이 60여채 있어 생계를 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주민들이 떠났고 노후화가 심해 안타깝게도 2020년 철거했다. 지금도 이곳 만(灣)에는 많은 어선과 낚시를 주로 하는 유선(遊船)이 정박해 있다.

2020년 철거된 만석동 굴막.(인천 동구 제공)
2020년 철거된 만석동 굴막.(인천 동구 제공)

그렇다고 만석부두가 산업부두로 하역작업만 한 것은 아니다. 1981년 연안부두에 인천종합어시장이 개설될 때까지 화수부두와 함께 수산물이 왕성하게 거래돼 인천의 어시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물 객주 위탁판매 업소도 17개소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만석부두는 산업부두와 여객부두, 어선부두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가진 제법 큰 규모의 부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화수부두와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도 주말이면 낚시꾼들이 몰려 유선을 타는 관계로 만석부두의 명맥을 근근이 잇고 있다. 이곳 만석부두 역시 동구가 추진하는 ‘만석·화수 해안산책로 사업’이 끝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 같다. 흥성한 포구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만석부두로 들어오는 어선.
만석부두로 들어오는 어선.
만석부두 어선에서 게를 정리하는 모습.
만석부두 어선에서 게를 정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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