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옛 부두를 찾아서(5)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기계공장 ‘조선기계제작소’

화수부두에서 나와 화수사거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위용을 자랑하는 현대식 빌딩이 서있다. 2014년에 준공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통합R&D센터 건물로 주변의 낮은 공장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게 우뚝 솟아있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만석부두 들어가는 길까지 거의 900m가 현대두산인프라코어 공장의 담장이 이어져있고, 공장이 워낙 커서 들어가는 정문이 3개나 된다. 물론 문마다 경비실이 있어 외부인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2014년에 준공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통합R&D센터 건물(2022).
2014년에 준공된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통합R&D센터 건물(2022).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제1정문(2022).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제1정문(2022).

이곳이 바로 잠수함을 건조했던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이었다.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은 1937년 6월에 설립됐는데, 등기상으로 본사는 경성에 뒀으며 공장은 인천부 만석정(현재 화수동)에 세웠다.

‘조선기계제작소’의 모회사는 일본 종합기계회사인 요코야마공업소(橫山工業所)로 당시 조선에서는 한창 광산개발 붐이 일었고, 이에 광산기계와 토목, 기타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을 이곳에 세웠다. 이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대단위 기계공장이었으며, 우리나라 근대 기계산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창립할 때 자본금 50만원으로 출발했으나 광산채굴기계 매출의 호조로 그해에 바로 300만엔으로 증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2배로 증자를 한다. 그리고 창업 직후부터 수익을 내 2년째부터는 6%를 배당했다고 한다.

창립 초기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1937,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창립 초기 조선기계제작소 인천공장.(1937,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1939년에는 일제에 의해 군수공장으로 전환됐으며 공장 땅을 확장하며 해당 토지의 조선인 가옥들이 철거된다. 이에 1939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철거령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부내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에서는 공장 부지로 매수한 화수정(花水町) 무내미 십 번지에서 이십오 번지에 이르는 일대 일백삼십여 호에 철거령을 내렸다는 바 이 철거령 발표로 백여 주민은 이전지가 없을 뿐 아니라 건축자재가 결핍되어 있는 작금 건축도 어려울 뿐 아니라 더욱이나 점차 날은 차오니 어떻게 살아가나? 하고 벌써부터 공포에 떨고 있는바 지주인 전기공장으로서는 이전비나마 도매간 오 원내지 팔 원밖에 주지 않는다 하여 주민의 격분을 사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백여 호 주민은 농성하고 끝까지 항쟁을 하고자 결의 방금 이전비 증액요구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바 과연 법의 재단은 어떻게 귀결을 지을 것인지 크게 주목을 이끄는 바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건조한 ‘조선기계제작소’

조선기계 제작소 창립초기 생산 시설.(1937,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조선기계 제작소 창립초기 생산 시설.(1937,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대규모의 군함과 수송선을 잃은 일본 해군은 계속해서 미군에 밀리며 더 이상 육군의 보급품을 수송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일본 육군은 1942년 해군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마루유’라는 수송용 잠수함을 건조한다는 기상천외의 계획을 세운다. 이후 일본에 있는 히타치(24척), 니혼제강(9척), 안도철공(2척)과 더불어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3척)’에도 잠수함을 주문했다.

1990년대에 대우중공업을 다녔던 인사에게 잠수함 설계도면이 회사 내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2019년 화수부두 달빛기행을 안내할 때 두산인프라코어를 퇴직한 인사에게도 설계도면을 직접 봤다는 말을 들었다.

도면을 공개적으로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일본 육군 제7기술연구소에서 제작한 기본설계 도면을 받은 ‘조선기계제작소’는 ‘대우 30년사’에 200톤급 잠수함 14척을 건조했다고 기록돼있다.

1883년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물밀 듯 밀려오며 유난히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을 많이 가진 인천에서 잠수함이 처음으로 건조된 것이다.

육군에 납품한 시기는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였으며, 실제 납품한 잠수함은 단 3척으로 그 이름을 ‘유3001호’, ‘유3002호’, ‘유3003호’로 붙였다. 물론 ‘조선기계제작소’는 일본 육군이 마루유 건조를 100척 가까이 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신규 직원을 1300명 채용하며 종업원 수가 3000명 정도로 늘었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잠수함 건조 중 계획은 무산됐다.

조선기계제작소 옆 드라이 도크에 방치된 잠수함.(1946, 한국항만연수원인천연수원 제공)
조선기계제작소 옆 드라이 도크에 방치된 잠수함.(1946, 한국항만연수원인천연수원 제공)

종전 시 ‘조선기계제작소’ 드라이 도크에는 건조 중인 마루유 잠수함 6척이 줄지어 있었다 한다. 그중 완성단계에 있던 2척은 미군에 의해 인천 앞바다에서 폭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4척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드라이 도크에 그대로 방치돼 미군이 촬영한 기록물에 남아있다.

종합기계 공장으로 발돋움한 ‘한국기계공업’

광복과 더불어 ‘조선기계제작소’는 1946년 상공부 직할 공장, 1949년 국방부로 이관해 해군이 관리하다 다시 상공부로 이관, 1951년 국영기업체, 1952년 상공부와 국방부 공동관리, 1955년 국방부로 다시 이관 해군이 관리, 1961년 상공부로 이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1963년 5월 20일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며 국영기업체로 재발족했다. 그러나 계속 이어온 비능률과 경영부실로 1968년 9월 신진자동차주식회사가 인수해 민영화하지만 ‘한국기계공업(주)’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했다.

1966년 한국기계공업 시절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1966년 한국기계공업 시절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한국기계공업 설립기념식.(1963.05.21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한국기계공업 설립기념식.(1963.05.21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1960년대 한국기계공업 주물작업.(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1960년대 한국기계공업 주물작업.(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한국기계공업 디젤엔진공장 준공.(1972.05.21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한국기계공업 디젤엔진공장 준공.(1972.05.21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한국기계공업(주)’는 신진자동차가 경영에 참여하며 국내 최대의 종합기계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1969년에는 정부로부터 디젤엔진공장 실수요자로 선정돼 서독 재정차관과 상공차관 등 25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1975년에 디젤공장을 완공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부곡차량주식회사를 인수 합병해 철도차량 공장을 완성하고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개별주문 방식으로 소량 다품종 생산체계이기에 원가 부담의 가중과 수주 물량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디젤엔진공장을 만들며 막대한 차관을 도입한 까닭에 회사의 재무상태가 날로 악화돼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렀다. 결국 여러 부실요인이 겹쳐 ‘한국기계공업(주)’는 경영 정상화의 길을 걷지 못하고 1975년 7월에 한국산업은행의 관리회사가 됐다.

이에 정부의 재무구조 개선책으로 산업은행과 시중은행이 대출한 금액을 출자금으로 전환하고 두 차례 증자를 해 재무구조를 개선했지만 경영 부실이 심화돼 정부 주도하에 민간기업을 물색하게 됐다.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기계 ‘대우중공업’

1986년 대우중공업 시절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1986년 대우중공업 시절 항공사진.(인천시 제공)

기계공업의 경험이 부족한 국내 굴지의 기업들은 인수를 기피했다. 그러나 대우실업주식회사는 기계공업 개척 의지와 민족적 자산인 산업설비를 사장시킬 수 없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한국기계공업(주)’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1976년 2월부터 ‘한국기계공업(주)’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그해 10월 대우그룹 계열사인 대우기계(주)와 합병해 ‘대우중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대우중공업(주)’는 인수 당시 자본금 120억원을 250억원으로 바로 증자해 단기간 내에 경영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종업원을 10% 정도 늘리고 우수한 기술과 기능 인력도 1000여명 새로 뽑아 질적인 향상을 도모했다.

특히 디젤엔진의 제휴선인 서독의 만(Man)사에 기술사원과 기능사원 연 500명을 장기 파견, 본격적으로 선진기술을 습득케 했다. 그 결과 1976년 매출액은 353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100% 이상의 신장을 보였고, 1976년 말에는 당기순익 15억원이라는 흑자를 보여 재계의 화제가 됐다.

또한 인수당시의 산업기계와 철도차량, 디젤엔진 3개 부문에서 정밀기계사업과 공작기계 사업부문이 추가됐으며, 지게차와 굴착기 사업 활성화와 더불어 중기부문이 새로 생겨 인수당시 3개 부문에서 6개 사업부문으로 확대됐다.

특히 1976년 지게차 생산라인의 구축, 1977년 굴착기 공장 건설, 1978년 선박용 디젤엔진 공장 준공 등으로 산업기계 부문의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해 명실상부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기계 제조회사로 자리매김하는 성과를 이뤘다.

1977년 대우중공업 굴착기 생산공장 준공으로 대량 생산체제 구축(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1977년 대우중공업 굴착기 생산공장 준공으로 대량 생산체제 구축(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엔진부문에서 자체개발한 고유모델 스톰엔진의 판매가 급신장해 국내 디젤엔진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고, 지게차는 OEM 수출사업으로 매년 1억불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리면서 1989년 수출 2억불 돌파의 견인차가 됐다.

건설중장비로 고유모델인 솔라굴착기를 개발해 회사의 주력제품으로 부상했으며, 1990년에는 2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함으로써 회사전체 매출의 22%를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급성장하던 ‘대우중공업(주)’는 1999년 대우그룹 해체로 채권단의 관리를 받다가 2005년 두산중공업이 인수해 ‘두산인프라코어주식회사’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이어서 16년 동안 운영됐던 ‘두산인프라코어(주)’도 두산그룹이 경영난을 겪으며 분할 매각됐다.

2021년 8월 현대중공업은 ‘두산인프라코어(주)’를 인수했고, 9월 10일 사명을 ‘현대두산인프라코어’로 변경했다. 현재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ICT 기술을 접목한 신제품과 신규 서비스를 한창 개발하고 있는 중이다. 인천을 위해서도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두산인프라코어 출범 및 제1차 이사회.(2005,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두산인프라코어 출범 및 제1차 이사회.(2005,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최초수출모델 DH07-3 굴착기.(1978.04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최초수출모델 DH07-3 굴착기.(1978.04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자체 기술로 개발한 솔라굴착기.(1985,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자체 기술로 개발한 솔라굴착기.(1985,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휠로더 국내 시판 기념.(1988,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대우중공업 휠로더 국내 시판 기념.(1988, 현대두산인프라코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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