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50)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 신문의 효시인 대중일보에 관계했던 인물들을 정리하고 있다. 경영에 관련했던 인물들을 다뤘고, 지난 회에 알아봤던 대중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던 엄흥섭에 이어서, 이번 회에서는 기자들과 주요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짚어본다.

● 김도인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대중일보에 소설 ‘삼불당’을 연재한 김도인은 진우촌, 정암, 고일, 원우전과 함께 연극 동인 칠면구락부의 멤버였다. ‘삼불당’은 1945년 11월 10일 부터 연재를 시작해 1부 32회, 2부 5회를 연재하고 중단됐다. 김도인은 1927년 습작시대 동인으로 활동했고, 1937년 1월 7일 창간된 문예지 ‘월미’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참여했다.

‘월미’는 단순한 문예지에 머물지 않고 인천의 다양한 소식을 종합한 지역종합지 성격이 강했다. 이는 발행인이자 편집인이던 김도인이 가지고 있던 인천에 대한 그의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잡지의 명칭이 ‘월미’였다는 것에서부터 그런 의도가 배어나온다. ‘월미’ 창간호의 목차를 보면 ‘인천을 노 젓는 이들’ ‘인천의 인물은 누구누구?’ ‘인천지형의 곡선미’ 등 인천 지역성을 강조하는 글을 배치하고 인천 지역 소식을 전달하는 고정 꼭지를 배치해 지역 소식을 전달했다.

문인이자 문화인인 김도인은 1937년 6월 11일에 동아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발령받아 활동을 시작했다. 동아일보 재직기간은 길지 않아서 일 년을 채우지 못했는데, 입사한 다음해 2월 5일에 퇴사했다. 해방 이후에 대중일보의 문화부장을 맡아 기자로 참가했다.

김도인은 교육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5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300여명 학령아동이 노상에서 방황한다는 기막힌 사정을 듣고 김도인이 강화 동검도에 소규모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인천문학동맹 기관지인 ‘인민문학’의 발간을 주도했고, 다른 문화 활동에도 관여했다. 대중일보 1947년 3월 18일자 대중일보 기사에 보면, 김도인이 인천지역 문화단체연맹에서 주관한 종합예술제에서 함세덕의 희곡인 ‘하곡’의 상연 기획 중 흥행책임자로 검속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김도인의 행적은 불분명하며,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이 기록된 것은 1948년 8월 25일자 대중일보에 실린 수필이다.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이 됐다거나, 월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 이원창

경상북도 안동 출신인 이원창은 독립운동가 이육사와 평론가 이원조의 친동생이다. 일제 강점기에 ‘남선경제일보’ 인천지국 기자, 조선일보 인천주재 기자, 매일신보 인천주재 기자로 근무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인 1940년에 조광에 ‘경성의 다리목 인천’이란 글을 발표했다.

광복 후 대중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이원창은 1944년 1월 이육사의 시신을 북경에서 수습해 귀국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46년 창간한 인천신문 창간 멤버로 참여해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 손계언

조선일보 인천 주재기자를 지낸 손계언은 1929년 인천청년동맹 회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대중일보가 창간하자 정경부장 직책을 맡았고, 이후 결성하 인천신문기자회 부의장을 지냈다. 대중일보를 떠나서, 1946년 창간한 인천신문에서 총무국장을 맡았다.

● 김응태

김응태는 1921년 인천 동구 화평동 409번지에서 출생했다. 1933년에 영화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다가, 영화학교 졸업 후 2년이 지나서 인천공립상업보습학교에 진학했고 1937년에 졸업했다.

김응태는 1937년부터 45년까지 인천우편국 직원을 지냈다. 1945년 5월에 인천부청 직원으로 옮겼다가 해방을 맞았다. 대중일보에는 1947년 2월에 입사했다. 1950년 9월 대중일보를 계승한 ‘인천신보’ 사회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에는 ‘주간인천’ 편집국장과 사장을 겸임했고, 1965년 ‘인천신문’의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겸임했다. 1966년 ‘경기일보’ 편집인을 지냈고 1973년 동 신문의 부사장을 역임했다. 1973년 언론통폐합 이후 언론계를 은퇴했다.

● 이벽

이벽은 대중일보 창간 멤버인 이종윤의 장남으로, 192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신문관련 학원을 수료하고 1947년 2월 약관의 나이에 대중일보에 입사했다. 1950년 인천신보 경제부장과 취재부장을 역임했다. 1955년 동양통신 인천특파원을 지냈고 1966년 경기일보 편집부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73년 언론통폐합 이후 언론계를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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