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9)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지난 회에 이어서 대중일보를 구성했던 인물들을 정리한다. 지난 회에서 다룬 인물들이 주로 경영진 쪽 성향의 인물이었고, 이번 회는 기자를 중심으로 다뤘다. 대중일보 기자들은 문필가 출신이 많았고 좌파적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 엄흥섭(嚴興燮)

대중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엄흥섭은 1906년 충남 논산 채운면 양촌리 출신으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소학교 5학년에 경남 진주로 이사 가서 경남도립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사회주의 사상을 탐닉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1929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도서주식회사에 근무하며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는 1929년 가입하고 참여했으나, 기관지격인 ‘군기’에 KAPF 지도부를 비난하는 글을 실어 1930년에 제명당했다. 그러나 KAPF와는 계속 교류하고 사회주의 작가로 활동했다.

엄흥섭은 그의 작품과 활동에 비추어 볼 때 동시대 다른 KAPF 작가나 월북 작가들에 비해 덜 알려졌는데, 아마도 제명당해 주류에서 비껴나 있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의 데뷔작인 ‘’흘러간 마을’이나, 대표작인 ‘출범전후’에서는 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과 어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엄흥섭은 인천 최초의 신문 대중일보의 초대 편집국장으로 인천 언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인천과 연을 맺고 있다. 인천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 소설 ‘새벽바다’를 잡지 조광에 발표했고, 1937년에는 인천에서 발간된 문예지 ‘월미’의 창간에도 참여했다.

엄흥섭이 인천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으로 보인다. 1937년 월미 창간호에 실린 그의 글 ‘인천소감’을 보면, 1924년 가을에 기차를 타고 하인천 역에 내려서 처음 인천을 방문했고, 조선 제일의 명소인 월미도 조탕을 다녀갔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인천을 해방도시라 평하며, 인천을 사랑하면서도 슬퍼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인천이 항구이며 동시에 해방된 낭만적 항구이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또한 인천을 노동하는 대중도시로 묘사하고 있고, 인천에 카페와 술집, 양복점, 사진관 미두꾼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곧 부두 노동자의 삶이 쪼들려 간다는 반향이라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가 인천을 사랑하면서도 싫어하는 이유를 이렇게 꼽고 있는 것은 곧 그의 좌파적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천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소설 ‘새벽바다’는 인천을 근대도시의 모순을 보여주는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매일 수천명의 노동자가 들끓고 있는 인천항에서 주인공 최서방은 빈곤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서방의 삶은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과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등과 대비되고, 그와 전혀 상관없는 도시의 또 다른 얼굴과 비교해 묘사한다.

최서방은 자신과 똑같이 곤궁하고 팍팍한 삶을 살다가 중국으로 팔려가는 계집의 짐짝을 들어주는 대가로 근근히 삶을 이어가는데,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천의 노동자 계층 사람들의 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도시 인천이 갖고 있는 어둡고 황량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설이다.

엄흥섭은 1927년 동인지 ‘습작시대’ 창간에 진우촌, 한형택, 김도인 등과 같이 참여하며 인천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어 김도인 등과 1937년 월미를 창간했고, 1945년 12월에 ‘인천문학동맹’을 결성했다.

1945년 대중일보의 창간 멤버로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나, 곧 퇴사하고 대중일보 출신 기자들이 주축이 된 인천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신문 시절에는 미군정재판에서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5천원 형을 선고받았다. 1947년 7월 25일에는 서울의 ‘제일신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북조선인민공화국 창건 소식을 보도했다가 실형을 살았다.

1951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작가동맹 평양지부장과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7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자로 출발하여 변절했다가 복귀하고 월북한 그의 이력을 보면, 한국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살아낸 인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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