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8)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개항 이후 인천에서 발행된 신문이 여럿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천 언론의 효시는 1945년 10월에 창간한 대중일보이다. 대중일보 이전의 인천 신문은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이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나마 인천에 뿌리를 둔 신문은 모두 사라지고 중앙 언론의 인천 지국만이 존재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창간된 대중일보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인천 언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일보를 창간하고 발전시킨 인물들은 인천 언론의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s)들이다. 또한 대중일보를 구성했던 인물들이 인천의 언론 지형을 형성했다는 의미가 크기에 이들의 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송수안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1930년대 신축 당시의 선영사. 선영사는 대중일보를 인쇄했다.

대중일보 창간의 주역인 송수안은 1903년 황해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 출신으로 기록된 문헌도 있으나 황해도에서 출생해 어릴 때 인천으로 이사 왔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사실이다. 송수안은 양복점으로 성공했고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사업가이자 문화인이었다.

송수안은 1926년 진우촌, 고일, 김도인 등과 함께 연극 동인 ‘칠면구락부’에 참여했다. 고일의 인천석금에 의하면 송수안은 고일의 작품인 ‘눈물의 빛’을 가무기좌에서 공연할 때 주인공을 맡았는데,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공이 사라지자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원작과는 무관하게 공연을 마쳤는데, 이 일화를 낭만적 추억으로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회고하고 있다.

송수안이 언론계에 투신한 것은 1944년에 매일신보 인천지사장에 취임한 이후였다. 고일은 송수안이 매일신보 인천지사장을 지내던 시절을 인천 언론의 황금기로 묘사하고 있다.

행방이 된 1945년 송수안은 고주철, 이종윤 등과 함께 대중일보를 창간했다. 이후 송수안은 대중일보의 후신인 인천신보 사장에 취임했다.

송수안은 정통 언론인은 아니었으나 최초의 인천 신문을 창간했고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언론사가 강제 통폐합을 당하기 이전까지 인천 언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인천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 고주철

대중일보의 초대 사장을 지낸 고주철은 1893년 인천 외동에서 태어난 인천 토박이이다. 인천이 낳은 위대한 미학자 우현 고유섭의 숙부이며, 일제 강점기 시절 애관극장 옆에서 한방을 겸한 병원인 고주철의원을 운영한 의사였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출신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서 개성에서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인천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인천의도회 회장을 역임했고, 인천의 청년운동, 체육, 문화운동에 후원했다. 1945년 대중일보 창간에 자본금을 제공하고 초대 사장을 지냈다.

● 이종윤

대중일보의 창간인 중 한명인 이종윤은 1899년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박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1920년 동경공예학교 인쇄과를 졸업했다. 오오사카마이니치신문에서 인쇄 기술을 익히고 인천으로 돌아와서 1924년 내리교회 앞에서 인쇄소 선영사를 설립했다. 대중일보 공무국장으로 창간에 참여했고, 1950년에 인천신보의 부사장 겸 편집인을 역임했다.

인쇄소를 운영하던 이종윤이 대중일보에 참가한 것은 해방 직후 혼란기에 인천에서 신속하게 신문을 창간할 수 있던 배경이 됐다. 서울의 신문사들이 인쇄 시설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창간이나 복간이 늦어진 것에 비해 인천은 이종윤의 인쇄시설을 이용해 대중일보를 빠르게 창간할 수 있었다.

● 진우촌

진우촌의 본명은 진종혁으로 1904년 인천 출생이다. 1922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강화 하별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3년 동아일보에 희곡 ‘개혁’이 당선됐다. 1925년에는 조선문단에 ‘구가정의 끝날’을 발표했다. 1926년에 연극 동인 ‘칠면구락부’에 송수안, 고일, 김도인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27년 ‘습작시대’ 1937년 ‘월미’ 문예지 발간에도 참여했다.

인천의 제물포청년회, 한용단, 인천소성노동회, 유성회, 인천배우회(인배회) 등 여러 조직에 참여해 활동했다. 그의 글은 진취적 성향을 담고 있는데, 당시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 보인다. 대중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1951년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했다.

● 고일

인천 언론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인 고일은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생후 4개월에 인천으로 이주했다. 1918년 양정고보에 입학했고, 1919년 경인기차통학회에 참여했다.

1923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고,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 등을 역임했다. 1926년에 진우촌, 송수안, 김도인, 원우전 등과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연극 활동에도 참여했다. 1932년 북만주로 망명했다가, 1937년 귀국했다.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고일은 무엇보다 ‘인천석금’의 저자로 인천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제공했다. 인천석금은 고일이 주간인천에 1년여 연재했던 글을 엮어서 발간한 책으로 근대에서 현대에 걸쳐 인천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담아냈고 인천의 언론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인천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록한 산문이다.

우리가 지금 과거 인천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인천 향토사 연구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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