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7)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인천 최초의 국문 신문인 대중일보가 창간한 것은 1945년 10월 7일이었는데, 신문이 창간하고 나서 불과 3개월 후인 1946년 1월 13일에 대중일보의 주축이었던 일군의 기자들이 퇴사해 인천신문을 창간했다.

당시 좌우로 나뉘어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사회상이 큰 원인이었는데, 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을 구성한 인물들의 성향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인천의 언론지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의미 있는 일이다.

대중일보의 창간 주역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경영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룹과 문인 출신 기자들 그룹이다. 경영진을 구성한 고주철, 송수안, 윤세원, 이종윤 등은 인천의 자산가들이었다.

우현 고유섭의 숙부인 고주철은 저명한 의사였고, 송수안은 자수성가한 자산가로 해방 직전에 매일신보 인천지국을 인수해 경영했다. 윤세원과 이종윤은 인쇄업자로 각 인천인쇄합자회사와 선영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모두 성공한 인천의 자산가들로 이들이 대중일보 창간의 주역이었다.

경영진의 이념적 성향을 확실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중도 보수적이라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성공한 자산가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온건 보수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반면 대중일보 기자들의 성향은 대체적으로 진보적이었다. 대중일보 기자를 구성한 엄홍섭, 김도인, 진종혁, 이원창, 손계원은 문학동인 ‘습작시대’의 중심인물이거나 청년운동가들로 진보 성향이 강했다.

인천의 지식인들은 해방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에 ‘인천신문화협회’를 구성하는데 인천 지역의 문화인들이 거의 대부분 참여한 단체였다. 인천신문화협회는 ‘인천인민위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런 조직을 기반으로 빠르게 단체를 결성할 수 있었다. 이후 12월 18일에는 진보적 문인단체로 인천문학동맹이 결성됐다.

인천문학동맹에는 위원장 엄홍섭을 비롯해 대중일보 기자인 김도인, 김차영, 송종호, 김수근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인천문학동맹이 결성된 것은 다수의 인천문화인이 참여한 ‘인천신문화협회’의 일부 회원이 보수 성향을 보이며 내부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분열상을 보임에 따라 진보적 성향의 단체설립은 필연적 결과였고, 이를 반영해 인천문학동맹 창립 강령에는 ‘진보적 민족문학의 건설’이라는 항목이 명시돼 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대중일보의 창간사와 1946년 연두사를 보면 진보적 성향이던 기자들의 견해가 반영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중일보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진보적 문화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대중일보는 초기 진보적 성향이 사라지고 중도 보수 성향으로 전환한다.

해방 직후 한반도 전체가 이념대립이 극심했고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수 성향의 한민당 인천지부가 설립되며 우익을 대표하고, 좌익 세력인 인민위원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정치지형이 양분됐다.

이런 시기에 자산가들이 경영을 맡은 대중일보의 한계를 느낀 진보 성향 기자들이 보다 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결국 창간 3개월 만에 대중일보를 퇴사하고 새로운 신문 창간 작업에 들어갔다.

1946년 1월 13일자 대중일보는 편집국장 엄홍섭, 정경부장 손계언, 사회부장 이원창, 문화부장 김도인, 기자 박성원, 송종호, 서봉도가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46년 3월 1일에 인천신문이 창간했다.

인천신문은 김택수가 대표를 맡았고, 총무국장에 손계언, 엄홍섭이 편집국장을 맡아 창간했으나, 창간 후 불과 2개월 만에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언론지형은 좌익 성향이 강했다.

미군정청은 좌익 성향의 언론을 규제하기 위해 군정법령을 공포해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했는데, 그 첫 번째 적용 대상이 ‘인천신문’이었다.

일제가 남기고간 적산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천시청 적산과장의 부정행위에 대한 인천신문의 보도를 미군정청이 허위사실로 규정했고, 군정법령을 적용해 인천신문 사장 이하 60여 명을 연행했고 5명에 대해서는 실형을 선고했다.

또한 7월 5일에는 횡령혐의로 이사장과 상무, 그리고 사무원이 구속됐다. 신문사 사무실이 우익 청년의 습격을 받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수난을 겪던 인천신문은 신문 발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급기야 대부분의 사원들에게 사퇴를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극심했던 좌우 대립과 미군정청의 정책이 언론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인천의 언론이 가장 먼저 규제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위상과 비중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개항기 시기부터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 있어서 인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도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천신문이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안, 대중일보는 점진적으로 중도 보수 성향을 보이고 미군정청에도 호의적 태도를 보이며 지역성을 강조하는 신문으로 전환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