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6)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해방 직후 한국 사회가 어수선 하던 1945년 10월 7일, 서울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앞서 인천에서 <대중일보>가 창간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했던 일본계 신문이나 서울에 본사를 둔 신문의 인천 지국을 제외하면 <대중일보>는 순수하게 인천의 신문으로 발간한 최초의 신문이다.

<조선일보>가 1월 23일, 동아일보가 12월 1일에 복간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 서울 신문에 앞서 인천에서 먼저 신문이 창간했다는 사실은 당시 인천이 언론 창간에 매우 우호적인 환경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기존에 발행하던 일본 신문의 시설을 인수해 신문 인쇄를 할 수 있었기에, 지방에서 신문 발행이 서울보다 더 용이했었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근대 개화기 시절에 인천이 외국의 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선구적인 문화 환경을 가질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인천은 미국의 문화가 가장 먼저 상륙한 장소가 됐다.

미군이 처음으로 상륙해 주둔한 곳이 인천이었고, 미군정이 먼저 실시된 곳이 인천이었다. 이런 환경과 더불어 해방 당시 인천의 경제력과 문화 환경이 서울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는 사실도 인천에서 <대중일보>가 창간할 수 있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런 환경을 감안하다면, 인천에서 활동하는 지식인들과 문인 그리고 문화계 인사들이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문 발행에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천의 경제인들과 문인들이 인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추진한 <대중일보>의 창간은 송수안이 중심이 돼 추진했다. 사장에는 고주철, 편집인 겸 발행인에 최상철, 인쇄인에 윤세원이 맡아서 발행했다. 처음 타블로이드 2면으로 창간했으나, 준비가 부족했던 관계로 1면으로 발행하다 추후 2면 발행으로 늘어났다.

신문 창간의 자본을 제공한 사장 고주철은 외과의사로 우현 고유섭의 숙부였고 인천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출신인 고주철은 애관극장 앞에서 고주철의원을 개원해 운영했는데, 멀리 개성과 강화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경기도의사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중일보>의 창간을 주도하고 운영이사장이자 총무국장을 겸임했던 송수안은 1903년 인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시사’에 의하면 인천출생으로 돼 있으나, 황해도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30대 초반에 인천으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송수안은 양복점으로 성공해 인천상공회의소 평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송수안은 1944년에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맡아서 언론계에 투신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송수안이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으로 취임했을 때가 신문 판매가 가장 왕성한 시기였고 그런 점에서 송수안은 행운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창간을 주도한 송수안이 운영이사장을 맡았던 것은 비록 그가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지냈지만 정통 언론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선영사의 모습.(인천투데이 자료사진)
1930년대 선영사의 모습.(인천투데이 자료사진)

<대중일보>가 다른 도시에 비해 이른 시간에 창간할 수 있던 것은 1924년부터 인천에서 ‘선영사(鮮英舍)’라는 인쇄소를 운영하던 이종윤을 인쇄책임자로 기용해 인쇄를 맡겼기 때문이다.

박문학교 출신인 이종윤은 <오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에서 인쇄기술을 배운 후 인천에 돌아와서 내리교회 앞에서 선영사를 운영했다. 인쇄소를 구하지 못해 복간이 늦어졌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보다 인천에서 <대중일보>가 먼저 창간할 수 있었다.

<대중일보>는 처음 궁정(宮町)에 사옥을 뒀다가 본정(本町) 4정목(丁目)으로 옮겼다. 지금의 중구 중앙동 4가 8번지로 진흥각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송수안은 1946년에 편집인에 이름을 올렸고 이종윤을 인쇄책임자 겸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이들 이외에 ‘새벽바다’의 작가 엄흥섭이 편집국장을 맡았고, 잡지 ‘월미’의 발행인 김도인이 문화부장을 맡았다고 적고 있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는 좌우 진영 대립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언론도 이념에 따라 편이 갈려서 대립하고 있던 것은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자본가가 중심이 돼 창간된 <대중일보>는 우익의 색채를 가지고 있었고 곧 이로 인해 내부 갈등을 겪었다.

1945년 11월 28일 <대중일보> 기자들을 중심으로 인천기자회가 결성됐는데, 위원장 엄흥섭, 부위원장 손계언은 모두 <대중일보> 출신이다.

인천기자회 소속 <대중일보> 기자들은 1946년 1월 13일 <대중일보>를 퇴사하고 얼마 후인 3월 1일에 <인천신문>을 창간했다.

좌익성향의 기자들이 우익성향의 <대중일보>를 떠나 새로운 신문을 창간한 것이었다.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은 인천을 비껴가지 않았고, 인천에는 <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이 각각의 성향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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