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4)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일왕의 목소리가 경성중앙방송국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라디오가 해방 소식을 전해주는 것과 동시에 일제에 의한 언론 탄압의 족쇄가 풀리면서 각종 언론은 봇물이 터졌는데 많은 숫자만큼 심각한 갈등도 빚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도 언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좌익 세력은 1945년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이에 맞서 우익 세력은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며 한반도에는 극심한 이념 갈등이 시작됐다. 언론, 특히 신문은 이런 이념 갈등의 한복판에서 유용한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됐다.

1945년 9월,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군정을 선포했고 한국 점령군 사령관인 존 하지(John Hodge) 중장은 9월 11일에 한국 땅에서 절대적인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일제에 의해 허가제로 엄격하게 발행이 통제되던 신문은 이제 신고만 하면 발행이 가능한 등록제로 바뀌었고, 그 결과 수많은 신문이 우후죽순 창간됐다. 하지 중장의 선언이 있고 나서 불과 몇 개월 만인 1945년 연말까지 창간된 신문이 40여 종이 넘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신문은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따라서 좌익과 우익의 양 정치 세력은 신문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세력의 확대를 꾀했다.

일제 치하의 언론 통제 하에선 일본어 신문 이외에 국문 언론을 찾기 어려웠고, 정치 목적 이외에도 해방 직후 국문 인쇄물에 대한 일반 대중의 갈증이 심했다. 따라서 신문을 비롯한 많은 인쇄물이 쏟아져 나왔다.

KBS 역사 소개 영상 갈무리(출처 KBS 홈페이지).
KBS 역사 소개 영상 갈무리(출처 KBS 홈페이지).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일제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인수해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매일신보는 사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접수에 실패했다. 미군정이 언론을 접수하려 한 것은, 당시 언론의 다수가 좌익 성향을 보였기에 이를 통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직후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대부분의 신문이 좌익 성향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보고하고 있고, 팽창하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경계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한국 언론의 성향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 지형뿐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좌파 성향이었다.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38선 이남 한국인의 85%가 대의기구를 통한 모든 인민의 지배가 바람직하다고 답했으며, 70%가 사회주의를 좋아하는 사상으로 꼽았다.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비율은 13%에 그쳤다.

당시 한반도의 사회적 분위기가 좌파적이었고, 북쪽의 소련을 의식한 미국이 이를 통제할 필요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군은 군정법령을 공포해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첫 번째 적용 대상이 공교롭게도 '인천신문'이었다.

일제가 남기고간 적산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천시청 적산과장의 부정행위에 대해 인천신문이 보도했고, 미군정은 이 법령을 적용해 인천신문 사장 이하 60여명을 연행했고 5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인천은 이런 저런 일로 ‘최초’를 기록한 경우가 많다.

언론사가 급증한 것과 마찬가지로 출판도 급증했는데, 그만큼 한국어로 된 출판물의 갈증과 수요가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문과 출판이 급증하면서 종이 수요가 급증해 심각한 종이 부족 현상을 겪게 됐는데, 종이 품귀로 신문 휴간이 발생할 정도였다.

종이 부족이 심각하다보니 재생 종이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종이와 인쇄의 질이 매우 열악해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당시 한반도에 방송국은 총 17개가 있었는데 남쪽에 10개, 북쪽에 7개가 있었다. 경성중앙방송국은 미군 주둔 직후 1945년 9월 8일에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9월 14일에는 경성이 서울로 바뀌면서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미군정은 서울중앙방송국을 위시해 남쪽에 있던 방송국 10개를 모두 접수해 군정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 미군정은 방송국 조직은 물론이고 방송 기술, 방송 편성도 모두 미국식으로 바꿨다.

기존에 사용하던 방송국 콜사인(무선호출부호)도 ‘JODK’에서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n Broadcasting Systems’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현재 ‘한국방송 KBS’라는 명칭의 모태가 됐다.

콜사인이 장황하게 길었던 것은 당시 국제무선통신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였고, 정식으로 국제무선통신연맹에 가입한 것은 1947년 9월 3일이었다. 가입 이후 한국은 무선호출부호 ‘HL’을 배정받았고 방송국명을 ‘HLKA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방송의 날이 9월 3일인 것은 한국이 국제무선통신연맹에서 호출부호를 배정받은 날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영화도 미국 영화가 득세했는데,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미국 영화 상영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중앙영화배급사를 설립해 미국 영화를 독점적으로 배급, 상영하게 했다. 신문 방송의 통제와 더불어 영화 배급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보면, 미국이 미디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이 됐으나 사회적으로는 극심한 혼란상이 계속됐고, 미군정은 이런 혼란기에 미디어를 이용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니, 오랜 일제 식민지의 착취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약소국의 설움은 해방 이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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