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뮤지엄파크 기획] ⑥ 시립박물관, 인천의 정체성 보여주는 곳
인천, 이주민의 도시이자 전쟁의 도시,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시립박물관 올해 유물구입비 2억 원, 타 시ㆍ도보다 적어

[인천투데이 이보렴 기자] 인천시립박물관은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으로 인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인천 뮤지엄파크 조성 사업 속에서 시립박물관은 어떤 모습을 갖춰야할까.

뮤지엄파크 조성 사업은 DCRE가 용현ㆍ학익 1블록 도시개발 사업을 하면서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인천시에 기부한 토지 5만4121㎡(1만6371평)에 시립미술관과 시립박물관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최근 인천 문화예술계의 중요한 관심사다. 20년 동안 줄곧 요구된 시립미술관과 이전이 필요한 시립박물관을 동시에 건립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인천 중구 송학동 1가 1번지에 있는 건물에 문을 열었다. 석남 이경성 선생이 초대 관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소장 유물이 소산되고 박물관 건물도 포격으로 소실됐다.

1953년에 같은 장소에 복관해 운영하다가 1990년 미추홀구(남구) 옥련동 525번지 신축 건물로 이전했다. 2007년 송암미술관, 2008년 검단선사박물관, 2012년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시립박물관 산하로 편입됐다. 2014년 컴팩스마트시티부를 신설했다가 2017년 폐지하고 인천도시역사관을 신설했다.

시 문화콘텐츠과 관계자는 “시립박물관 콘텐츠 연구용역 최종보고회가 6월 17일 진행됐는데, 수정 사항이 있어 내부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 태평양 횡단기선 갤릭 호.(사진제공ㆍ인천이민사박물관)
미국 태평양 횡단기선 갤릭 호.(사진제공ㆍ인천이민사박물관)

이주민의 도시 인천, 이주의 역사 담아야

시립박물관 산하에 송암미술관, 검단선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도시역사관이 있다. 이중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하와이ㆍ미주 등지로 이주한 한인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인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인천은 이주의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인천은 백제 건국 설화에 처음 등장한다. 기원전 18년 주몽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졸본에서 한수(漢水) 이남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이 지금의 인천이다. 비류가 이주한 시기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미추홀이 인천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인천 역사가 이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인천은 전근대 역사에서 외국 사신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창구 역할을 했다. 동검도와 서검도는 외국 사신의 배가 입국하기 전 검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동검(東檢)과 서검(西檢)의 검(檢)은 ‘검사ㆍ검열’ 등에 쓰이는 한자다.

이어 인천은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다. 개항된 인천은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고 외국인들이 이주한 공간이자, 한인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당시 이주한 외국인들은 중구 개항장에 있는 각국 조계지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인천항을 통해 한인들이 해외로 이주한 대표적 사례는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이 주도한 하와이 이민 사업이다. 알렌은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돼 황실의 신망을 얻었다. 고종은 알렌이 추천한 데쉴러를 이민 사업 책임자로 임명했다.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의 겐카이마루 호에 승선해 일본 나가사키항을 향해 출발했다. 24일 나가사키항에 도착해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고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기선 갤릭호에 탑승했다. 이민단 121명 중 19명이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102명만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영화 ‘만신’ 스틸 사진.
영화 ‘만신’ 스틸 사진.

인천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주의 도시였다.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한 대표적 도시가 인천이다. 지난해 2월 23일 사망한 만신(萬神) 김금화 선생도 한국전쟁 중 인천으로 이주했다.

김 선생은 1931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했다. 12세부터 무병(巫病)을 앓고 17세에 외조모 김천일 씨로부터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됐다. 한국전쟁 중 연백에서 인천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2000년에는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을 맡았고 2005년에는 강화군에 ‘금화당’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활동했다.

전쟁의 도시이자,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은 전쟁의 도시다. 고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관미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개항기에는 외세와 격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때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관미성 전투는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해 백제의 영토였던 관미성을 함락한 전투다. 백제는 북진을 위해 고구려 남쪽 지역을 약탈했고, 390년에는 장군 진가모가 고구려 도압성을 함락시키고 200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가기도 했다. 고구려는 백제의 북진을 차단하고자 백제의 전진기지인 관미성을 공격한다.

관미성은 해안 방면에 있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다. 관미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파주 오두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강화군 교동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구체적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한강 하구의 요충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루가 복원된 남문 유량루. 교동도호부지와 안해루 장주초석. 남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폐가. 황룡우물.(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문루가 복원된 남문 유량루. 교동도호부지와 안해루 장주초석. 남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폐가. 황룡우물.(사진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인천은 외적을 방어하는 기지이자 관문이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이 모두 인천에서 벌어졌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많은 선교사가 순교하자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침입한 사건이다. 프랑스 로즈 제독은 1866년 강화도에 침입해 한강 수로를 봉쇄하고 강화성을 공격해 무기ㆍ서적ㆍ양식 등을 약탈했다. 이에 조선은 양화진ㆍ통진ㆍ문수산성ㆍ정족산성 등을 수비하고 프랑스군과 문수산성에서 교전해 승리했다.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이 1866년에 발생한 제너렬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침입한 사건이다. 미국은 강화도 초지진을 점령한 뒤 덕진진과 광성보도 차례로 점령했다. 하지만 6월 11일 광성진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을 물리친 조선은 이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개항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한 뒤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또다시 겪는다. 1950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단숨에 밀고 내려왔다. 이때 전세를 뒤집은 사건이 인천상륙작전이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9월 15일 새벽 단 2~3시간 만에 상륙에 성공한 후 김포와 서울을 탈환한다. 이처럼 인천은 전쟁의 도시다. 그러나 전쟁의 아픔을 잊지 않고 평화를 지향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인천상륙작전 개요도.
인천상륙작전 개요도.

인천시립박물관, 인천 역사 연구의 중심지 돼야

박물관은 한 지역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시립박물관에는 현재 학예연구관 4명과 학예연구사(휴직자 제외) 17명이 있다. 이들은 지역 역사 연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가 그만큼 시립박물관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박물관의 가치는 소장 유물과 전시 콘텐츠로 결정된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올해 유물구입비는 약 2억 원이다. 지난해는 1억 원이었다.

인천시립박물관 관계자는 “다른 지역 공립박물관과 비교하면 많이 적은 편”이라며 “다른 지역 공립박물관의 경우 평균 5억 원에서 상황에 따라 조금 변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인천 문화예술계 한 관계자는 “인천의 역사 연구의 중심 역할은 연구기능을 갖추고 다양한 전시콘텐츠를 구상한 시립박물관이 해야 한다”고 한 뒤 “더불어 인천문화재단 산하 인천문화유산센터와 협업해 인천 역사 연구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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