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 사랑한 ‘한인 문학가’
3월 16일 그래펠핑시 묘역에서

인천투데이=송승원 기자|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로 독일에서 큰 사랑을 받은 이미륵 박사의 74주기 추모제가 지난 16일 독일 그래펠핑(Graefelfing)시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제엔 박희석 본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와 쾨스틀러(Koestler) 그래펠핑시 시장 등이 참석했다. 제사는 한국식으로 치러졌다. 이미륵 박사 기일은 3월 20일이다. 추모제가 매년 기일이 가까운 토요일에 열리고 있다.

이미륵 박사의 유족들이 인천에 터를 잡았고, 기념사업회도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다.

유족대표인 이영재씨는 "해마다 추모제에 참석하는 대사관 관계자와 영사, 그래펠핑시 시장, 박희석 교수를 비롯한 관계자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16일 이미륵 박사 서거 74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16일 이미륵 박사 서거 74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3.1운동 후 독일로 망명··· 독일에서 조선 알려

이미륵 박사는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경’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어머니는 미륵이라 불렀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한 후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서울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 관련 전단지를 뿌렸고, 일제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고향으로 피신했다.

이후 상해를 거쳐, 1920년 5월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분도회 수도원에 도착했다. 같은 해 6월 대구지방법원은 이미륵 박사 없이 재판을 진행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대공황으로 일자리가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륵 박사는 독일에서 일제가 조선을 부당하게 침탈한 것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해야 함을 주장했다.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가했다.

독일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다. 반나치즘을 내세운 쿠르투 후버(Kurt Huber) 뮌헨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1943년 백장미단 사건으로 그가 처형당하자, 다른 지인들이 외면할 때 이 박사는 가족을 보살폈다.

1935년 부루노와 베른하르트에게 서예를 지도하고 있는 이미륵(맨 왼쪽).
1935년 부루노와 베른하르트에게 서예를 지도하고 있는 이미륵(맨 왼쪽).

1946년 이미륵 박사는 소설 ‘Der Yalu fliesst'(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했다. 소설은 독일에서 큰 사랑을 받았고,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독일에서 큰 인망을 쌓은 이 박사는 뮌헨대에서 한국어와 동양철학 등을 강의했다. 이후 1950년 3월 20일, 그래펠핑시에서 숨을 거뒀다.

이역만리에서 타계한 이미륵 박사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이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지난 2007년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다.

2019년 5월엔 이미륵 박사 묘지 인근 쿠르트 후버 교수 거리에 이미륵 박사의 동판이 설치됐다. 그 맞은편엔 쿠르트 후버 동판이 놓여, 두 사람의 우정을 기리고 있다. 이 박사 현판엔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는 문구가 새겨 있다.

압록강에서 서해를 지나 인천으로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는 고 정규화 박사가 뮌헨대학교에서 유학하던 1960년대 후반 괴페르트 교수의 수업을 들은 것에서 비롯됐다. 정 박사는 수업에서 ‘그래펠핑 월요문인회’ 좌장을 지낸 이미륵 박사에 관해 처음 알게 됐고, 이후 평생 이 박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이었다.

1976년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고, 약 35년이 지난 2011년 사단법인으로 발족했다. 사업회는 인천시에 적을 두었는데, 이는 이미륵 박사 유족이 인천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후 2013년 한·독 수교 130주년을 맞아 이미륵 박사 추모공연이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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