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미륵은 흐른다(상) 독일인이 사랑한 동양의 휴머니스트

지난 10월 13일부터 27일까지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독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이미륵 선생을 기념하는 전시회 ‘독일인이 사랑한 동양의 현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인천에서는 11월 23일 이미륵 선생 추모공연 ‘그리운 이미륵, 압록강은 오늘도 흐른다’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공연은 얼마 전 ‘보이첵’을 연출한 구보댄스컴퍼니(대표 장구보)가 맡기로 했다.

이미륵 선생은 황해도 해주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인천과 무슨 인연이 있을까? 인천지역 몇몇 인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신통한 답이 없다. 다만 이미륵 선생보단 그가 남긴 작품 ‘압록강은 흐른다’가 제법 유명하고, 그 작품이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반열에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인천과는 특별한 인연을 찾기 쉽지 않았다. 26일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을 때 인천에서 그를 기리는 추모공연을 준비하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륵 선생은 4남매 중 막내로, 위로 누나가 셋인데 그 중 첫째는 서울에 정착했고 둘째는 인천에 정착했다.

이미륵 박사 연구와 알리기에 평생을 바친 정규화(전 성신여대 독문학과 교수, 한국독어독문학회장 역임) 선생이 사단법인 이미륵박사기념회사업회 회장은 맡고 있는데, 기념사업회가 2011년 12월 인천에 둥지를 튼 것은 이미륵 선생 누이의 후손들이 인천에 정착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륵 선생이 남긴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주에서 출생해 독일에 정착하기까지를 담고 있다. 그의 유족이 인천에서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압록강이 서해로 흘러서 일 것이다. 인천에서 그의 추모공연을 준비하고, <인천투데이>에서도 그를 기리는 글을 쓰는 게 모두 이미륵 한 사람 때문이다.<편집자 주>


독일인이 사랑한 휴머니스트이자 동양의 현인

▲ 이미륵 박사(1948.)
이미륵 선생은 독일인이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전인적 인간이자 휴머니스트였다. 1959년 고 전혜린이 ‘압록강을 흐른다’를 국내에 알리기 전에도, 정규화 선생이 평생을 이미륵 박사 연구에 바치기 전에도, 이미륵은 이미 독일인이 배우고 닮고자했던 ‘동양의 현인’이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리기 전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먼저 실렸다. 그가 ‘압록강은 흐른다’로 보여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전쟁 후 혼란과 도탄, 실의, 자괴에 빠져있던 독일인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지금도 독일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에 있는 이미륵 묘소에서는 해마다 그의 기일에 맞춰 독일인들이 한국식으로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2009년엔 그의 묘소를 영구 사용할 수 있게 그래펠핑시가 승인해줬다. 머나먼 조국에서 그를 기리는 이가 없을 때, 독일에서는 그를 이처럼 대우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미륵은 독일에 가서도 끔찍한 전쟁을 지켜보면서 지냈고, 망명 중 벨기에에서 열린 피압박민족세계대회에 참여해 일제의 부당한 침입과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나아가 반(反)나치세력과도 연대했는데, 그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교수형에 처했을 때 그는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이미륵은 독일 민속학자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와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후버 교수는 반나치투쟁을 하다 1943년 7월 13일 뮌헨 슈다텔하임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후버 교수가 처형당한 뒤 그의 많은 지인과 동료는 후버가(家)의 사람들을 멀리했다. 그러나 이미륵은 그의 가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들은 이미륵의 따뜻한 정을 두고두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이미륵 박사가 독일에 있으면서 평소 보여준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언행은 독일인에게 ‘동양에서 온 현인’으로 비춰졌고, 그의 그런 세계관은 작품으로도 이어져 전후 도탄과 실의에 빠져있던 독일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4년 12월 독일(당시 서독)을 방문해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에게 간절히 차관(借款)을 요청했을 때, 독일 정부가 담보 없이 1억 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불)를 지원하기로 한 데는 이미륵 박사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신뢰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 박사는 훗날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유산이 정신적 혼돈에 빠져있던 독일인들에게 감동을 줬으며, 그러한 독일인들의 도움이 최초의 차관으로 이어지고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미륵 선생의 제자 중 문학가로 유명한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는 “우리는 세상의 소란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자기를 본보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를 입증한 한 인간이자 작가였던 이미륵을 존경한다. 그의 정직과 선함은 민족 혹은 종족 간의 다름조차 뛰어 넘을 수 있게 했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나로부터 가장 먼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신의 독자성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독자성을 보다 심오하게 하고 상승시키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륵불 은덕으로 태어난 아이라 ‘미륵’

▲ 이미륵 박사 57주기 제사(2007.3.20.). <사진제공·사단법인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이미륵은 1899년 음력 3월 8일 황해주 해주 수양산 자락 서영정마을의 꽤 성공한 상인 이동빈의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이동빈은 아들의 이름을 ‘의경’이라 지었고, 부인은 미륵불 은덕으로 점지된 아이라며 사람들에게 ‘미륵’이라 부르게 했다.

이동빈은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당시 조혼은 흔한 일이었다. 아버지 이동빈은 해주에서 상인으로 크게 성공한 최씨 집안의 딸 최문호와의 혼사를 결정했다. 1911년 이미륵의 나이 열한 살, 최문호는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1913년 여름 날, 알코올 중독 증세로 이미 수차례 발작을 일으켰던 부친은 혼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넘어간 후 세상은 어둡기만 했다. 한학을 공부했던 이미륵에게 신식 학교의 새로운 공부와 맞닥뜨린 세상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륵은 1916년 개설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강의록으로 독학을 시작해 1년 후인 1917년, 경성의대 2기생으로 합격했다.

해주에서 상경한 이미륵은 안국동에 자취방을 구해 친구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고향 해주를 찾아 봉사와 계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학 때 해주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을 즐겼다. 이미륵은 일본어 번역판 철학 책들을 탐독했다.

경성의대 재학 중인 1917년 첫째 딸 명주를 얻었고,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던 해 첫째아들 명기를 얻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딸 명주는 3년 후 사망했고, 아들 명기는 건강이 악화 돼 한국전쟁 무렵 숨을 거뒀다. 정규화 선생은 “이미륵 선생의 혈육은 현재까지 없다”고 했다.

경성의대 재학시절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을 선언하는 ‘조선독립신문’ 1호가 배포되면서 3.1운동의 막이 올랐다. 이미륵은 3.1운동에 가담했다. 이미륵 역시 수배인물로 지목됐다. 독일 망명 후 이미륵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재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수배가 떨어지자, 어머니는 이미륵에게 중국 상해로 피신할 것을 재촉했다. 이미륵은 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무사히 넘어 반드시 유럽에 갈 수 있게 될게다. 이 어미 걱정은 절대 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세월은 빨리 지나간다. 혹여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슬퍼 말거라. 너는 내 생애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제 혼자 네 길을 가거라!”

1919년 11월 27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한 이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망명하기 전까지 대한적십자대원으로 발탁돼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다. 의학도였던 그는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도 도왔다. 1920년 4월 이미륵은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인 학생여권을 얻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사진 한 장을 남긴 채, 유럽행 프랑스 여객선 ‘르 뽈 르까’에 몸을 실었다. 훗날 그가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한 여러 배경 중에는 그의 신분이 중국인으로 돼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상해에서 출발한 배는 1920년 5월, 프랑스 마르세유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이미륵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과 함께 독일로 향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던 안봉근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성 베네딕트회 빌헤름 수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미륵은 그의 도움으로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서 당분간 머물 수 이었다. 안봉근은 이미륵과 동행하기 전 이미 독일을 여러 차례 오갔다.(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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