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이미륵은 흐른다(하) 독일인 가슴에 한국과 ‘인본주의’ 심다

6년 공부 의학 접고, 이학과 철학의 길로

▲ 1935년 부루노와 베른하르트에게 서예를 지도하고 있는 이미륵(맨 왼쪽).
1920년 독일에 도착한 이미륵은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1년간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후, 1922년 4월 26일 의과대학생으로 등록해 전공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륵은 1925년 봄, 6년간 공부했던 의학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일제 강점기 서울 경성의대에서 3년,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2년, 그리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1년을 합쳐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를 과감히 접고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이미륵은 우연한 기회에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있던 안젤름 샬러를 만났고, 그의 소개로 훗날 자신의 지도교수가 된 동물학 박사 빌헬름 괴취 교수를 만난다. 그리고 과감히 뮌헨대학 동물학과로 전과했다.

뮌헨대학 3년차, 뷔르츠부르크대학 때 발병했던 폐결핵이 재발했다. 재발은 치명적인 것이어서 학생처 후생 담당의사는 이미륵에게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학업을 중단하길 권했고, 스위스 루가노에 있는 아그라요양소를 소개해줬다.

석 달간 요양생활을 마치고 뮌헨으로 돌아온 그는 이자르강 부근 베스터뮐 슈트라세에 값싼 자취방을 구했다. 이자르강은 가난한 그의 망명생활에 안식처가 돼주었다.

1927년 겨울 학기에 이미륵은 순수철학 강의를 신청했다. 운명이었을까? 이미륵은 그렇게 쿠르트 후버 교수를 만난다.

1943년 반(反)나치 활동으로 교수형을 당하는 후버 교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과 인지론을 바탕으로 대학생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이미륵은 후버 교수를 통해 ‘독일에서 학문의 어려움이 단순히 독일어 구사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양적 사고에 깊이 침잠해있었던 자신의 무의식적 사고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미륵은 1928년 7월 18일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그해 뮌헨대학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를 받자 더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생활은 또 다시 궁핍해졌다.

그 시기 이미륵의 서예 실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관심 있는 몇몇 독일인이 그를 찾아와 서예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 수업료와 일본 유학생들의 논문을 번역해주고 받은 사례비로 어렵게 생활했다.

이미륵을 보살펴준 자일러 박사 일가
이미륵이 보살핀 후버 교수 일가

그렇게 근근이 생활하던 중 1932년 그는 든든한 지원자가 돼준 알프레드 자일러 박사 일가를 만난다. 자일러 박사와 그의 부인 알리체, 딸 베르타, 그리고 아들 오토는 타국에서 홀로 망명 중인 이미륵에게 하늘이 맺어준 가족과 다름없었다. 이들은 이후 이미륵을 끝까지 보살피며 그의 임종을 지켰다.

1937년 12월 20일, 자일러 가족과 이미륵은 그래펠핑 아킬린디 슈트라세 46번지로 이사했다. 뮌헨 근교에 위치한 그래펠핑은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그래펠핑은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곳이자, 그가 훗날 영면하는 도시가 된다.

1938년 가을 어느 날, 한적한 그래펠핑 역 부근에서 그는 다시 후버 교수를 만났다. 십년만의 재회였다. 후버 교수는 자신의 연구업적들이 점차 나치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고 마침내 청년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태에 이르자, 베를린에서 그가 누리고 있던 모든 명예와 직위를 버리고 뮌헨대학의 음악 강사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후버 교수는 반나치 활동을 벌이다 게슈타포에 의해 연행돼 1943년 7월 13일 뮌헨-슈타델하임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진정한 학자적 기질과 양심을 지니고 있었던 후버 교수의 죽음은 이미륵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후버 교수가 처형당한 뒤, 그의 많은 지인들은 후버 일가의 사람들을 멀리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작곡가 카알 오르프 마저도 발길을 끊어버린 절망적인 외로움에 빠져있을 때, 후버 가족에게 유일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은 바로 이미륵이었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독일인을 감싸다
독일인들에게 동양철학의 인본주의 전해

▲ 이미륵이 쓴 ‘덕불고필유린’
1945년 5월 7일 마침내 독일이 전쟁에서 패했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패망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해방됐다. 그러나 이미륵은 홀로 깊은 감회에 젖어 귀국을 망설여야했다. 그는 결국 귀국하지 못했다. 그가 귀국을 망설였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에 실망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기다려주는 정인들이 고향에 남아있지 않아서다.

그가 독일에 머무는 동안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해주에 부인과 아이와 있었기 때문인데 이 무렵 모든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고향 해주에 머물던 이미륵 선생의 어머니는 아들이 아주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어 화병으로 62세(1920년)에 세상을 등졌다고 전해졌다.

1946년 5월 드디어 그의 소설 ‘Der Yalu fliesst(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됐다. 책이 나오고 3개월 후 독일에서 이름난 잡지와 지역신문에 찬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소설은 독일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인들에게 한국사람, 한국 문화, 한국 역사를 고결하고 품위 있는 동경의 대상으로 각인시켰고, 끔찍한 전쟁 속에서도 고결하고 순수한 정신세계를 지키고 있었던 한국인 이미륵을 흠모하게 했다.

독일이 패망한 후 2차 세계대전 당시 무르익었던 게르만 민족의 우월감에 대한 환상 역시 급격하게 무너졌다. 그러면서 독일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 등장했던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인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미륵은 1947년 7월 에파 수잔네 크라프트(1923-2007)를 만난다. 베를린 태생인 그녀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당시 중국학과 몽고 언어학의 권위자였던 에리히 해니쉬 교수가 뮌헨대학에서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뮌헨대학을 찾았고, 그곳에서 이미륵 박사를 찾아가라는 권고를 받았다.

뮌헨대학에서 동양학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해니쉬 교수와 이미륵의 만남은 이미륵의 운명을 다시 바꾸었다. 1947년 해니쉬 교수가 뮌헨대학 동양학과에 한국어를 개설해 이미륵을 정식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1948년 여름학기부터 이미륵은 뮌헨대학에서 강의했고, 첫 개설 과목은 한국의 언어와 역사, 논어와 맹자, 동아시아 문학사였다. 훗날 그의 제자 볼프강 바우어는 뮌헨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됐고, 제자 권테 데본은 하이델베르크 동양학부 교수가 됐다.

영원히 잠들던 순간 “아, 정말 아름답구나…”

해마다 겨울이면 감기처럼 찾아드는 늑막염으로 고생한 이미륵에게 독일의 겨울은 무지 춥고 길었다.

1950년 3월 20일, 병상의 이미륵은 가정부에게 물 한잔을 청했다. 그는 건네받은 차가운 물을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다 뿌리고는 힘없이 침대에 쓰러지며 긴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통증으로 신음하는 그에게 주치의 베크만(Peter Beckmann) 박사가 모르핀(=아편의 주성분인 알칼로이드)를 주사하자, 곧 가쁜 숨이 잦아들고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졌다. 저녁 8시 20분 무렵이었다. 이미륵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가족과 다름없었던 자일러 부인과 오토, 제자 에파 크라프트는 ‘애국가’를 부르며 고독한 조선인 망명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은 24일 치러졌다.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마지막 길, 조문객 300여명이 그의 관을 조용히 따랐다.

세상 고통을 가슴 속 깊이 품고도 늘 그윽한 웃음으로 온후한 인정을 베풀었던 인간 이미륵을 떠나보내며, 생전 그가 즐겨 불렀던 로베르트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누군가가 불렀다. 조문객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낯선 땅을 떠돌던 한 영혼이 고향 압록강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식을 취하길 기도했다.

이미륵 박사가 죽고 난 후 5년 뒤인 1955년 10월, 스물한 살 한국 여성을 태운 비행기가 독일에 도착한다. 전혜린이다. 전혜린은 1959년 이미륵 박사의 9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이미륵 박사가 독일에서 쓴 ‘압록강은 흐른다’를 번역해 한국에 알렸다.

1963년, 한국 정부는 이미륵에게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국가보훈처는 이미륵에게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다.

▲ 이미륵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 출생

1905년 서당에서 한학 공부 시작

1910~14년 해주 제일소학교에 다님

1911년 최문호와 혼인

1914년 신식 중학교 다님(건강악화로 휴학)

1914~16년 강의록으로 독학

1917년 독학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첫째 딸 명주 출생(3년 후 사망)

1919년 경성의대 재학 당시 3.1운동 가담
일본 경찰을 피해 상해(上海)로 망명
첫째 아들 명기 출생(한국전쟁 무렵 지병으로 사망)

1919~20년 상해 망명객 도우며 독일 유학 준비
적십자 대원,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편집부장으로 활동

1920년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의 도움으로 프랑스 여객선 ‘르 뽈르까(Le Paul Lecat)’ 타고 유럽으로 출발
              5월 26일 독일 뮌스터 슈바르차하 분도회 수도원 도착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2년 선고(궐석재판)

1922~23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과대학 진학, 건강 악화로 잠시 휴학

192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전학

1925년 뮌헨대학교 동물학과로 전학(전과)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조선 독립 호소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이학 박사 학위 취득

1928~1930년 뮌헨에서 서예 지도

1932년 자일러(Seyler) 교수 집으로 이사
독일 문예지 ‘다메(Dame)’에 단편 ‘하늘의 천사’를 독일어로 발표, 작가활동 시작

1935년 독일 잡지 ‘아틀란티스(Atlantis)’에 단편 ‘수암과 미륵’ 발표

1942년 ‘어느 한국인의 유년에 대한 회상’ 단편 발표

1946년 뮌헨 그래펠핑에 문인단체 ‘월요대담회’ 설립
독일 뮌헨의 피퍼(Piper) 출판사에서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 출판

1948~50년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학, 한국학, 동아시아 문학사, 동양철학개론 등 강의

1950년 3월 20일 그래펠핑(Grafelfing) 자택에서 위암으로 타계

1959년 작가 전혜린 ‘압록강은 흐른다’ 첫 한국어 번역 출판

1963년 대통령표창(독립운동 공로) 수여

1990년 12월 26일 훈장증(건국훈장 애족장, 제2019호) 추서

2007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훈장 수여
※ 참고문헌 ‘이미륵 평전’(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정규화),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