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순교자 무려 8000여명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58년 전인 1866년 3월 7일은 구한말 조선 시기 병인박해가 발생한 날이다.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 향년 77세)에 의해 조선 조정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을 일컫는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절두산 순교 성지.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해 '머리가 잘리는 산' 이라는 뜻인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렸다. (사진제공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절두산 순교 성지.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해 '머리가 잘리는 산' 이라는 뜻인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렸다. (사진제공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됐다. 이는 한국 역사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다. 이때 천주교 순교자 수는 8000여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의 실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처음부터 천주교에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가 일으킨 병인박해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1860년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6~1860) 패배로 베이징 조약(영국·프랑스·러시아와 체결한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과정서 러시아는 청나라로터 연해주 지역을 할양받는다.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가 점령한 후 조선은 두만강을 기준으로 러시아와 직접적인 국경선이 맞닿는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 통상을 빈번하게 요구했다.

청나라가 서양 열강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목격한 조선은 반가울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외교 흐름에 위기를 느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생각해낸 건 국내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정부 협조하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외교 교섭이 틀어지자 흥선대원군은 회의감과 반발심을 느낀다. 그리고 이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로 이어진다.

이에 더해 대외적 요인도 존재한다. 1866년 베이징으로부터 조선에 서신이 왔다.

그 내용은 2차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킨 후 대대적인 살육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에 더욱 적대적 성향을 띤다.

병인박해로 조선인 신도는 1866~1871년 동안 천주교인 약 8000여명이 사망했다. 아울러,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엔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참수 당했다.

이 사실을 접한 프랑스는 보복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그렇게 조선은 프랑스와 전쟁인 병인양요(1866)를 겪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