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⑩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설탕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꿀, 조청 등의 대체품이 존재한 덕택에 옛사람들은 구하기 어렵던 설탕에 집착하지 않았다.

과거 군밤, 군고구마 등은 겨울철 대표 군것질 음식으로 맛도 뛰어나고 영양가 높았으나 곶감의 감칠맛은 뛰어났고 먹기도 편하고 보존성까지 좋아 겨울철 자연 간식으로 짝을 찾기 어려웠다.

우는 아이도 곶감을 주겠다고 어르면 울음을 그친다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지만 사계절 내내 먹는 풍족한 음식은 아니었다. 지금은 싱싱한 횟감과 관광지로 유명한 푸른 바다 강릉이지만 곶감 산지로 이름나던 때가 있었다.

19세기 한반도는 물류가 원활하지 않아 싱싱한 해산물을 수도권으로 운반할 방법이 없었으니 곡창지대가 아닌 강릉 사람들도 무언가는 팔아야 했다.

곶감은 감과 비교해 보존성 높고 무게도 가벼워져 운반이 쉬우니 감이 많이 열리는 곳은 앞다퉈 곶감을 만들어 팔려 애썼다. 곶감은 지금도 꾸준한 인기가 있으나 과거에 비할 바 안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면 설탕 산업 발달로 빵, 화과자, 찹쌀떡 등이 인기를 얻으며 곶감에 비견되는 단맛을 사계절 공급하게 된다. 한반도에서의 설탕 수요는 1920~30년대 급격히 증가했다.

물론 당시 설탕 가격이 지금처럼 싸지는 않았으나 사탕수수 재배지인 대만이 일본에 복속되면서 안정적 설탕 공급원이 확보된 영향이 크다.

‘애국빵’이야기 편에서 일본의 쌀 수탈 과정과 대체 식량인 밀가루 홍보 과정에서 칼로리 비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을 언급했다. 설탕으로 맛을 끌어올리고 노동강도가 높던 시절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당시 캐러멜 광고.
당시 캐러멜 광고.

우리가 아는 익숙한 포장의 모리나가 캐러멜의 인기는 대단했다.(사진) 사진의 좌측 광고처럼 칼로리 높은 캐러멜이 어린이에게 좋은 영양간식처럼 홍보가 되던 시절이었다.

일본어 모리나가제과, 즉 삼영제과는 건빵을 대량생산 일본군에 납품했던 전범기업으로 오른편 광고도 시대적으로 매우 자연스럽다.

건빵을 전투식량으로 개발 활용했던 일본군은 건빵 봉지 안에 사탕을 넣어 맛과 팍팍한 식감을 개선했고 우리에게 익숙한 지금의 군용 건빵 체계를 만든다.

일제강점기 산업발달은 필연적으로 군수산업과 맞물려 있었고 제빵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직접 건빵을 만드는 방법보다 납품받는 체계가 효율적이었으므로 군국주의 체제에서의 지원은 국가적이었다.

삼영森永 캬라멜이 좋다고 박람회博覽會를 가드니 잔뜩 사가지고 와서는 어데다 감추어 두고는 정향貞香이를 주고주고 한다. 많이도 않 주고 단 한 개 아니면 두 개! 시장쯩이 나서 못 견댈 지경이다. 그러나 어린애들은 아버지한테 받어 먹는 菓子는 더 맛이 있는 모양이다.

삼천리 제12권 제10호- 즐거운 나의 가정家庭 중

위 광고사진의 캐러멜 회사 제품을 아이에게 한두 개씩만 주니 아이는 안달이 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이정도야 뭐 군것질거리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이니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날 전국적으로 학교에서 캐러멜 한 갑씩을 나눠주는 행사가 있을 정도였다.(사진 매일신보 1942. 11. 06.)

매일신보 1942. 11. 06.
매일신보 1942. 11. 06.

1942년 11월 매일신보 기사는 풍작을 기념 농림성에서 전국적으로 2~13세까지의 아동에게 10전 가격인 캐러멜 한 갑씩을 분배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칼로리가 높으면 무조건 좋다는 방식은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물자가 풍부한 시절이 아니라서 설탕은 단맛의 장점뿐 아니라 비타민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단맛을 좋아해 설탕이나 합성감미료가 첨가되는 음식과 건강식품 등이 많다. 19세기에 개발된 사카린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합성감미료가 사용됐다.

지금도 가끔 뉴스에 나오는 1960년대 사카린 밀수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사카린이 사용됐으나 강한 법적제재를 받는 불법 감미료였다. 사카린은 술, 빵, 빙과류, 만두 등 다양하게 사용됐으며 발각되면 강한 처벌을 받았다.(사진 동아일보 1934.7.8.)

서울 장곡천정長谷川町 등원藤原이란 사람하고 안씨安氏란 이 하고 우리가 만히 알든 ‘러-시야’빵을 제조해 팔게 되엿다. 그것도 그 당시는 갑이 싸서 엇더한 사람 치고 안 먹어 본 사람은 업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싼 것이 안이엿다. 지나支那(중국)빵에 늣는 소-다보다 더 약 10분의 2 가량은 더 느은 것이고 홋떡은 설탕이나 만히 느어 단맛이나 잇는데 그것은 설탕을 늣는 것이 안이라 비일사탕이란 것은 重양으로 말하면 약 一分쯤 뿌리는 것이다.

사실은 홋떡보다 더 원가는 저근 물건이요 보기에 크게만 보엿지 滋養分엔 홋떡보다 소다를 더 뿌려서 사람에게 害物이다. 이런 것은 나종에서야 비로소 싸지 안타는 것을 알고 사지를 안어 그여이 그 영업은 하지 못하고 그만 그 者도 害를 보게 된 것이다.

별건곤 1928년-너나업시 날마다 속는 비밀秘密, 누구든지 알어 둘 秘密, 각방면各方面의 비밀내막秘密內幕 중

동아일보 1931.12.31.
동아일보 1931.12.31.

위의 글은 1920년대 유행하던 러시아빵이 사라진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 중 비일사탕이란 단어는 아마도 사카린을 지칭할 것이다.

설탕이 들어간 단맛의 중국 호떡과 비교하면 원가도 낮고 소다로 많이 부풀린 러시아 빵은 영양분이 적고 사카린이 첨가된 유해식품이라는 설명이다.

설탕은 일제강점기 필수소비재로 세금에 따라 가격이 변동될 정도의 국가 관리품목이었다.(사진 동아일보 1931.12.31.)

쌀 부족을 해결하고 대체식량 체계를 위한 지속적 설탕 공급 확대는 시골 농가에서도 빵을 익숙하게 만들었고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진 빵은 단맛 위주의 카스텔라, 단팥빵 등의 계열로 정착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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