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⑪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빵을 판매하는 장소 중 카페 이야기 편에서 철도를 따라 중심역에 끽다점(차를 마시는 다방)이 형성된 내용을 언급했다.

1899년 경성과 인천을 오가는 철도가 처음 만들어진 때 현재의 서울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용객이 많아지자 경성 중심역에도 현시대의 다방과 편의점 기능이 필요해진다.

1909년 11월 3일 황성신문은 11월 1일 남대문정차장에 끽다점 개설 소식을 알렸다. 끽다점 이용 현황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1913년 8월 7일 황성신문은 7월 중 끽다점 이용객 수는 743인으로 음식료 수입과 연초(담배) 판매액 수입까지 자세히 밝혔다.

남대문정차장의 끽다점은 후에 경성역이 만들어지면서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경성역 티룸으로 발전하게 된다. 1920년대 부산역에서 출발 유럽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었고 만주를 거쳐 북경을 가는 철도의 역할은 분단국가인 지금과 사뭇 달랐다.

장거리 여행객을 위해 철도 편의시설에서는 도시락을 판매했고 중요 여행코스에는 철도국 직영 숙박시설도 만들어 금강산호텔 등을 운영했다. 당시 철도와 항만은 물류와 여행의 중추를 담당했으며 농어촌인구가 대다수였던 시절 신문물을 접하는 현장이었다.

철도에서 판매하는 음식의 변천사는 사회환경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기도 했으면서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10년대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 기차여행 중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강한 호기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열차 이용객이 먹을 빵 가격과 중량의 변화까지 기사로 자세히 나오는 시대였고 그만큼 열차의 역할은 컸다.

매일신보 1944년 5월 22일.
매일신보 1944년 5월 22일.

1939년 12월 1일 동아일보는 철도국 운영 호텔 구내식당과 열차 식당에서 판매하는 신제품 빵 소식을 전했다. 1944년에는 밀가루, 과즙, 어분, 해조류를 섞어 만든 신제품 철도빵을 개발 열차 안에서의 판매 기사가 있다.(사진 매일신보 1944년 5월 22일)

건빵은 일본이 병사용 식량으로 일찍부터 개발을 서둘러 산업화를 이룬 품목이라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만나는 건빵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940년 5월 평안남도 각 관청에서는 점심에 건빵 식사를 강제하는 소식이 전해진다.(사진 동아일보 1940년 5월 23일) 2차세계대전 시기로 절미운동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40년 5월 23일.
동아일보 1940년 5월 23일.

1940년 4월 20일 동아일보에 초등학교, 중학교 아동의 도시락(벤또) 검색 소식도 신문에 실렸다. 대용식 빵을 가져오는 학생 수와 쌀밥을 가져온 비율조사가 목적이었다. 관청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생 역시 점심에는 빵을 먹는 비율을 높일 목적이었다.

군사용 건빵과 가정용 건빵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가정용 건빵은 감자가루와 쌀가루 등을 첨가해 식감을 높이는 방법을 권장했다.

각종 신문에서 건빵 만드는 법을 소개했으나 신문에 나온 방법대로 만들면 대체로 딱딱한 건빵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잡지 유머에 빵을 만들었더니 너무 딱딱해서 ‘딱딱한 밀가루’ 반품하는 우스개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건빵의 딱딱함은 보편적 현상으로 여겨진다.

일본은 건빵이 쌀소비를 줄이는 목적 외에도 건빵은 보존기간이 대략 1개월이라고 소개하며 비상식량으로도 활용토록 권고했다. 수분 비율을 줄여 딱딱한 식감이지만 보존기간이 늘어나 비상시를 대비할 목적으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강점기 ‘총후문학’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총을 들고 싸우는 후방에서도 전사의 마음가짐으로 문학을 한다는 뜻으로 군국주의 일본이 추구하는 사회의 단면이었다.

철도빵과 건빵은 쌀을 대체하는 단순한 식사의 개념을 넘어 국가 총동원체제를 확인하는 지표 역할을 했다. 현시대 사람들은 군대의 경험과 추억이 깃든 건빵 정도로 생각하겠으나 100년 전의 건빵은 일본과 조선의 일반 국민 모두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집과 징용 희생자의 회고에 건빵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일본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고등학교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가 있다.

이들은 미군 오키나와 상륙을 앞둔 1945년 3월 23일 15~19세의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의 학도대로 구성돼 육군병원 간호 요원으로 복무했다.(히메유리 학도대 동원 사범학교 1944년 사진, 출처 나무위키)

히메유리 학도대 동원 사범학교 1944년 사진, 출처 나무위키
히메유리 학도대 동원 사범학교 1944년 사진, 출처 나무위키

이들 중 136명이 전사했는데 일본정부는 어린 여학생들이 자원입대했으며 강요에 의한 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히메유리 학도대를 포함해서 일본군도 전투식량으로 건빵을 먹었다. 일본과 조선이 건빵을 같이 먹어서 공평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쌀소비 감소 양상, 빵소비 증가 그래프는 기울기의 차이만 있고 매우 유사한데 이는 식문화 변천에서 역사적 환경을 공유했던 시기가 존재한 영향이 크다.

지금까지 개화기 이후 빵과 카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식문화 변화를 짚었다. 당시 생활상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 빵과 떡이 혼합된 음식 이야기도 있으나 전문 종사자가 아니면 크게 관심 가는 사안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빵 이야기는 마무리한다.

잠시 쉬었다 인천의 빵 특집으로 돌아오겠다. 정확히 100년 전 인천의 작은 섬 월미도에도 빵집과 카페가 존재했다.

인천항 월미도 심층 특집에서 관광지 형성과정, 제분산업, 청나라 상인 쇠퇴, 인천의 빵집 한 곳을 분석해 역사적 사건의 이해를 돕는다. 아울러 군산의 빵집 이야기도 곁들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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