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일대 탐방(5)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

‘중심성 공해루 초석’은 어디에

징매이고개 생태통로를 건너자마자 계양산 자락에 ‘중심성 터(衆心城址)’ 비석이 보인다. 1990년에 ‘인천향토교육연구회’를 설립하고 인천의 다양한 기행 코스를 만들기 위해 거의 매주 인천을 대표할 수 있는 길들을 찾아서 걸었다.

대부분은 혼자 걸으며 길을 만들었지만 어떨 때는 시간이 되는 선생님들과 길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

‘중심성 터(衆心城址)’ 비석.
‘중심성 터(衆心城址)’ 비석.

1990년 계양산 일대 기행 코스를 만들 때 일이다. 3~4명이 같이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양산 일대 기행 코스 중 다른 곳은 다 연결했는데 중심성 터가 문제였다.

당시에 컴퓨터가 보급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처럼 검색 기능도 없어 사람에게 묻고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중심성 공해루 초석’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분이 경명대로 반대편에 표시해준 지도를 갖고 산자락 숲속을 거의 3시간은 헤맨 거 같다.

경명대로에서 공촌사거리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중구봉 북서쪽 산자락을 샅샅이 뒤졌다. 길 없는 숲속에 길을 만들며 집터 2개 정도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혼자 갔다면 으스스한 기분에 숲속을 헤매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려 하자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포기하자는 말들이 나왔다. 그래도 혹시 하며 해가 지기 전에 길 건너편 계양산 자락으로 내려가 보자고 했다. 이런 뜻밖의 말에 ‘중심성 공해루 초석’을 찾게 될 줄이야.

오로지 초석이 하나 풀밭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을 쌓았던 흔적도 성벽의 돌도 하나 남지 않았다. 다만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광복 후 미군들이 공사를 위해 성벽의 돌들을 모두 실어 갔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1910년 일제의 ‘읍성철거령’에 따라 전국의 읍성 성벽들이 파괴돼 사라지는데 이때부터 중심성도 서서히 파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중심성 공해루 초석’이 아니라 ‘중심성 사적비 귀부’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 경명대로 아래로 서구 검암동이 보인다.(1992년 늦가을)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 경명대로 아래로 서구 검암동이 보인다.(1992년 늦가을)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1992년 늦가을).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1992년 늦가을).

1992년 가을 계양산 일대를 안내하며 분명 ‘중심성 공해루 초석’을 확인하고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다음 해 가을에 학생들을 안내하며 다시 찾았을 때 이 초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아는 이가 없었다. 혹시 시립박물관에서 가져갔나 해서 알아봤지만 없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몇 년 후에 서구가 분실될까 걱정돼 구청 주차장 앞 풀밭에 옮겨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인천향토교육연구회’ 외에는 지역을 안내하는 기행 프로그램이 없었던 상황이고, 유물 유적에 대한 네트워크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 뭔가 노천에 있는 유물이 사라져도 어디로 갔는지 정보를 얻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중심성 공해루 초석’을 처음 봤을 때 ‘이상한 모양의 초석도 다 있네.’라고 생각했다. 표면에 새겨진 거북 문양도 그렇고 그 중앙에 파진 사각형 홈도 있어 이것으로 어떻게 공해루의 초석으로 사용했을까 의문을 가졌는데, 2022년에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이전하며 ‘중심성 사적비 귀부’라고 정확한 명칭이 적혔다.

아마도 그 당시 ‘중심성 공해루 초석’이라고 한 까닭은 귀부에 붙은 거북의 머리 부분이 파손된 것과 인천시립박물관 조사 때 문루의 초석을 확인했다는 내용에서 유추한 것이리라.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 때 중심성 문루의 초석과 성곽의 기초, 중심성 사적비 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심성 사적비는 인천박물관(세창양행 사택, 현재 맥아더 동상 자리)으로 옮겨 보관했으나 안타깝게도 인천상륙작전 중 함포 사격으로 건물이 전소되며 파괴됐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중심성 사적비를 옮기며 왜 귀부는 같이 옮기지 않았는지. 혹시 이 귀부에 세워져 있던 비신은 다른 내용의 것은 아니었는지.

외세의 침략에 따른 인천·부평 연안의 중요성

해동지도(1724~172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동지도(1724~172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세기 서구 자본주의는 영국, 프랑스,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 규모로 발전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세계 곳곳을 점령하며 식민지로 삼는다.

그들은 자국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해외의 값싼 원료가 필요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했다. 많은 식민지를 경영하던 그들이었지만 또 새로운 식민지도 필요했다. 그래서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조선에도 드디어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나 해안을 측량하고, 섬과 해안 마을에 기어올라 약탈을 일삼으며 문호를 열라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의 식민화 정책은 무장상선을 출몰시키고, 급기야는 조선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 등이 그것인데, 이때부터 염하(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물길) 입구에 있는 인천의 전략적 중요성은 한층 높아지게 된다.

병인, 신미 두 양요 때에 불, 미 함정들은 모두 인천 앞바다의 물치도(작약도) 앞에 정박하여 군사행동을 개시했고, 운요호사건 때는 영종진을 맹포격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 육전대(해병대)까지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이런 까닭에 인천, 부평, 영종진 일대는 자연히 군사적 요지가 됐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 체결 후 일본은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하게 된다. 그리고 20개월 이내에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더 개항해야 한다는 조규에 따라, 조선은 삼남 조운의 요충이며 도성 관문의 목젖에 해당하는 인천·부평 연안을 개항장으로 제시하리라 추정한다.

이에 인천·부평 연안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논의는 1877년 10월경부터 구체화했으며, 조정에서 1878년 8월 27일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진사(鎭舍)와 포대(砲臺) 축조공사를 맡겨 1879년에 화도진과 연희진이 완공된다. 이후 개항으로 인해 해안 방어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임오군란 후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연희진은 1882년 폐지된다.

징맹이고개(경명현)에 세워진 중심성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1992년 겨울).
중심성 공해루 초석으로 알려졌던 중심성 사적비 귀부(1992년 겨울).

그리고 1883년 제물포 개항에 따라 고종이 유사시를 대비해 해안에서 도성으로 향하는 육로를 차단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교시를 내린다.

이에 부평부사 박희방이 부평부민의 성금을 모아 징매이고개(경명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한다. 현재 경명현 생태통로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계양산 정상 방향, 남으로는 중구봉을 향하는 능선의 등산로와 그 주변 부근이다.

‘중심성(衆心城)’이란 이름은 부평 부민의 성금을 모아 축조했기에 ‘백성의 마음으로 쌓은 성’이란 뜻에서 부평부사 박희방이 붙인 것이다. 현재 중심성 사적비는 폭격에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필사한 비문이 있어 지금까지 비문의 내용이 전하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심성 사적비(衆心城 事蹟碑) 원문과 해석

桂陽山之西 有峴曰景明 卽沿海關門 不妄位玆州 有志關防未就矣 是歲九月之小晦 仍詔勅 經紀城堡 吏民便宣 樂爲之赴役 西築將臺 爲鍊武之所 門因地名以景明 建上高樓曰 控望海 謂衆心者□何義 今以家民之心 築城則 此國語所謂衆心成城也 故名以衆心者豈不美哉 時重修軍器 諸津砲士爲此固守之策 訖役之日 府人請以事蹟 以余不文辭 略爲之紀 而特捐六十金付之邑上下洞 以爲城牒修茸之資焉 光緖九年癸未十月 行府使 朴熙房 記而書

(이하 내용은 생략)

계양산의 서쪽에 경명이라는 고개가 있으니, 곧 연해의 관문이다. 재주 없는 몸으로 이 고을의 원으로 와서 관문 방어에 뜻이 있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했다.

이해 구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때 아전과 백성에게 성이 있어야 고을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더니 모두 즐겁게 부역에 응해줘 서쪽에 장대를 쌓고 무예를 닦는 곳으로 했다.

문은 지명을 따라 경명이라 했고, 그 위에 높은 다락을 세워 공망해라 했으며, 중심이라 한 것이 어떤 뜻이냐 하면 백성의 마음으로 성을 쌓았다는 것인즉, 이것은 우리말로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쳐 성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심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이때 모든 병기를 다시 고쳐 모든 나루의 포사들로 나루를 굳게 지키게 꾀했다.

성을 쌓는 역사를 마치는 날 고을 사람들이 성을 쌓게 된 경위를 쓸 것을 청함으로 글을 지을 줄 모르는 나이지만 그 경위를 간략하게 적거니와, 특히 읍내의 상동 하동에서 육십 금을 연출해 성을 쌓는 자금으로 보태었다. 광서 구년 계미 시월 행부사 박희방 글을 짓고 쓰다.

이상은 중심성 사적비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볼 때 중심성은 성문이 한 개로 누문으로 됐으며, 장대가 있었으나 역시 서쪽 한 곳에만 쌓아 올려, 보통 동·서에 장수의 지휘대인 장대를 쌓아 올린 성들과는 달리 서장대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의 크기를 비롯한 성의 구축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글귀가 없어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중심성 사적비’에 얽힌 설화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옮겨진 중심성 사적비 귀부.
계양산성박물관으로 옮겨진 중심성 사적비 귀부.

‘중심성 사적비’에는 또한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이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바라본 양갓집 며느리는 이상하게도 바람이 나서 놀아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이를 막기 위해 몰래 비석을 쓰러뜨려 버렸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이 비석을 본래 대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처럼 세워 놓으면 다시 쓰러뜨리고, 쓰러뜨리면 다시 세우곤 하는 것을 수십 차례나 되풀이했다 하니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가 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비석과 관련된 다른 지역의 설화는 비석이 기우는 방향에 있는 마을에 흉년이 들거나, 기우는 쪽 마을의 처녀나 과부가 바람이 난다고 하여 비석을 절대로 흔들지도 못하게 하는 금기 사항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중심성 사적비’는 오히려 서 있으면 바람이 나서 몰래 쓰러뜨렸다니 특이한 경우의 설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심성 사적비’는 화강석 귀부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갖춘 높이 151㎝, 폭 46㎝, 두께 25㎝의 규모였다고 전한다. 현재 중심성의 흔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귀부는 ‘계양산성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가끔 ‘중심성 사적비 귀부를 원래 있던 자리로 원위치시키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유물 유적은 그것이 태어난 그 장소에, 그것도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채 그대로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직접 대하는 것과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 장소에서 만들어진 유물 유적은 그곳의 풍토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곳의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인간 지혜의 결정체라 생각한다. 파손되는 것이 우려된다면 똑같은 모형이라도 만들어 ‘중심성 터(衆心城址)’ 비석 옆에 전시하여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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