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일대 탐방(3)

인천투데이=천영기 시민기자|경인교대입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그 앞에 청운교회가 있다. 청운교회 입구를 지나 교회담장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청운교회비전센타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 앞에 길 안내판이 있는데 향교로 18번길로 들어서 60여m 가면 오른쪽 계단 위로 부평향교의 영역을 알리는 하마비와 홍전문이 우뚝 솟아있다.

부평향교의 역사와 공간구조

하마비와 홍전문.
하마비와 홍전문.

고려 인종 5년(1127) 제주입학광교(諸州立學廣敎, 주마다 학교를 세워 가르침을 넓혀라)라는 왕명에 따라 수주(樹州)향교가 계양구 오류동 산4번지에 세워진다. 당시 전국 56주의 향교가 모두 이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의종 19년(1165)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안남향교도 안남산 남쪽(계산2동 한우리 아파트 부근)에 이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2년(1215)에는 안남이 계양도호부로 이름이 바뀌어 계양향교로 불렸을 것이다.

이 후 충선왕 2년(1310)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로 고쳐 불러왔고, 조선시대로 이어지다가 병자호란(1636)을 맞아 문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된다. 이에 52년이 지난 조선 숙종 14년(1688)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이 문묘를 재건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다행히 병자호란 당시 깊이울(公村洞, 공촌동)에 보존하였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다시 제자리에 모셨다.

향교는 공자 이하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병설돼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강학공간(講學空間)과 배향공간(配享空間)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향교의 건물 배치는 평지의 경우 전면이 배향공간이고 후면이 강학공간인 전묘후학(前廟後學) 방식을 취한다. 구릉지인 경우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이거나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기도 한다. 부평향교 역시 인천향교와 마찬가지로 구릉지에 축대를 쌓아 건물을 배치했기에 전학후묘 방식을 취했다.

하마비와 홍전문을 지나 외삼문으로

부평향교 배치도.
부평향교 배치도.

부평향교의 하마비(下馬碑)는 홍전문 왼쪽 기둥 앞에 있는데 인천향교 하마비와 마찬가지로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와 문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를 지칭하는 용어로, 향교 역시 문묘(文廟, 문선왕묘의 약칭으로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홍전문(紅箭門)은 능·원·묘·궁전·관아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살문이라고 한다. 그 형태를 보면 나무로 만든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없이 붉은 살(紅箭)을 박아놓았는데, 그 가운데에 태극무늬를 새겼다.

태극무늬를 지나는 홍살들은 서로 꼬여있어 삼지창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문은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예전에 홍전문을 지나 부평향교의 외삼문(外三門)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현재 길 왼쪽은 정원이, 오른쪽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향교 앞으로는 차도가 나있다. 차도에서 보면 외삼문은 16개의 계단 위에 있기에 계단 좌우로는 축대를 쌓았다.

부평향교 외삼문.
부평향교 외삼문.

외삼문 좌우로 담장을 둘렀는데 오른쪽은 행랑채처럼 교직사(校直舍, 향교의 관리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수복청이라고도 함)가 있어 창이 밖으로 나있다. 교직사는 ‘ㄱ’자 형태의 건물로 안방과 부엌, 건넛방, 헛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삼문은 신삼문(神三門)이라고도 하는데 문을 세 칸으로 나눠 출입구를 셋으로 만든 데서 비롯한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며, 엄격히 따진다면 중앙 솟을대문은 신문(神門)이고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며, 인문은 열어둬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중앙의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온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

명륜당.
명륜당.

외삼문을 지나면 바로 앞에 명륜당(明倫堂)이 나온다. 명륜당은 강학하는 공간으로 교육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힌다.

건축양식을 보면 경사진 곳에 명륜당을 지었기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계단처럼 사용할 수 있게 널찍하게 세벌대 기단을 만들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굴도리집으로 부연을 달지 않고 홑처마로 구성했다.

건물 중앙 3칸은 칸마다 세살 창호로 장식한 2짝여닫이문들을 달았으며 그 아래 댓돌을 놓아 출입하기 좋게 했다. 기둥은 민흘림기둥을 사용했으며 막돌초석 위에 올려놓았다. 건물 뒤편 중앙 3칸에는 판문(板門)으로 된 창호가 달려있다.

명륜당 뒤편과 동재, 서재.
명륜당 뒤편과 동재, 서재.

명륜당 뒤쪽 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동재(東齋), 왼쪽으로는 서재(西齋)가 대칭으로 위치해있는데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가, 서재에는 양민의 자제가 기숙했다. 건축양식을 보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정면 중앙 칸은 대청마루가 놓였고 측면의 앞 1칸은 툇마루로 구성돼있다.

두 건물 모두 막돌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고 포작은 생략했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 납도리집이다. 다만 방 구조를 보면 동재는 좌측 1칸이 부엌이어서 서재보다 방이 1칸 적다.

그리고 서재는 좌우 2칸에 모두 2짝여닫이문을 달아 문이 모두 4개인데 방 안 구조는 2칸을 터서 매우 넓다. 반면 동재는 2짝여닫이문 2개에 오른쪽 1칸은 쪽문을 달았으며 동·서재 모든 방은 온돌로 돼있다.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내삼문.
내삼문.

강학공간과 배향공간은 내삼문(內三門)으로 나뉘어있다. 계단 위에 내삼문을 만들었는데 3칸 평면구조의 맞배지붕이며 좌우로 담장을 연결해 공간을 분리했다.

이곳도 역시 외삼문과 마찬가지로 신문과 인문으로 사용되므로 중앙의 신문은 항상 닫혀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성전(大成殿)이 보이고 좌우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원래 대성전은 공자와 4성(四聖, 안자·증자·자사·맹자), 중국의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조육현의 위패를 모셨는데, 1949년 전국유림대표회의에서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며 공문십철과 송조육현의 위패를 땅에 묻자고 결의했다.

이에 동·서무에 봉안하고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대성전으로 모셨다. 인천향교와 다르게 공자의 위패 좌우로 송조 6현 중 2현을 봉안했다. 오른쪽 동쪽에는 예국공 정호인 정자(豫國公 程顥, 程子), 왼쪽 서쪽에는 휘국공 주희인 주자(徽國公 朱熹, 朱子)의 위패를 모셨다.

추기석전제 당시 제례상. 공자의 위패 좌우에 송조 2현인 주자와 정자의 위패를 모셨다.
추기석전제 당시 제례상. 공자의 위패 좌우에 송조 2현인 주자와 정자의 위패를 모셨다.
대성전. 오른쪽 아랫벌대에 관세위가 놓여있다.
대성전. 오른쪽 아랫벌대에 관세위가 놓여있다.

대성전에서 향교의 가장 큰 행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열린다.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매해 두 차례 공자를 비롯해 위패가 봉안된 유현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원래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올렸으나 2007년부터 양력으로 환산해 공자가 돌아가신 날인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탄신일인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한다.

대성전의 건축양식을 보면 두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옆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건물 정면 아랫벌대의 오른쪽에는 관세위(盥洗位, 제향 때 제관이 손을 씻는 자리)라 쓴 돌이 놓여있다. 측면의 앞 1칸은 제향의 기능을 고려해 퇴칸으로 구성했는데 정면의 모든 주춧돌은 원형초석, 나머지는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기둥은 정면은 모두 두리기둥이며 측면과 후면은 사모기둥을 사용했다. 포작은 정면과 후면 익공을 장식하지 않고 보머리로 마감했다.

처마도 정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를 사용해 건물 뒤는 공력을 줄인 것을 알 수 있다.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 독수리 머리라는 뜻으로 궁궐 등 격식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하는 장식기와)를 놓아 문묘라는 격식을 차리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
대성전과 동무, 서무.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 앞 좌우에 있는 건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다가 1949년 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대성전으로 옮겼다. 동·서무는 건물 규모나 형태가 모두 같다.

건축양식을 보면 두벌대의 기단 위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민도리집으로, 측면의 앞 1칸은 퇴칸으로 구성했다. 주춧돌은 막돌초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사모기둥을 올렸다. 포작은 생략했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으로 옆에 날렵한 방풍판을 달았다.

대성전 좌측 뒤편으로 망료위(望燎位)라 쓴 자그마한 비석이 있는데 그 앞 땅에 너른 돌이 박혀있다. 이 돌 위에서 석전대제를 올릴 때 축문을 태우는데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인천향교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호연지기를 키운다면, 이곳 부평향교는 포근하고 아늑한 기분을 자아내 공부하기 좋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가족과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망료위. 추기석전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운 흔적이 남아있다.
망료위. 추기석전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운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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